5부. 메시야의 통로, 이스라엘
17.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동영상 큐레이션 : 아담의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출사표
Hidden Message in Genesis
일러스트 : John Song
이제까지는 아담과 하와를 시작으로 한 고대 인류사를 살펴보았습니다. 흠 없고 완벽했던 세상은선악과 범죄로 타락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담이 생기고 기쁨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인간의 두 가지 유형을 보여주었고, 인간의 죄악이 점점 심각해져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을 받기에 이르지요. 그리고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여덟 명으로 다시 시작한 인류는 백여년 만에 높은 탑을 쌓아 하늘까지 높아지려 하다가 언어가 혼잡케 되어 여러 민족으로 나뉘고 전세계로 흩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까지는 ‘인류 보편사’로 분류됩니다. 창세기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가 펼쳐지지요.
그런데 창세기 5장에는 아래 도표와 같이 아담의 후예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림 출처: http://www.bbb.or.kr/dongyeouido/board_14/262612)
그런데, 각 족장의 이름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이름 |
영어 뜻 |
영어 문장 |
우리말 의역 |
Adam |
Man |
Man (has) Appointed Mortal Sorrow; (but) The Blessed God Shall come down Teaching, (and) His death shall bring the Despairing Comfort. |
사람은 필히 죽음을 맞이할 슬픈 운명에 처해졌지만, 복되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가르치실 것이요, 그의 죽음은 절망에 처한 자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줄 것이다. |
Seth |
Appointed |
||
Enosh |
Mortal |
||
Kenan |
Sorrow |
||
Mahalalel |
The Blessed God |
||
Jared |
Shall come down |
||
Enoch |
Teaching |
||
Methuselah |
His death shall bring |
||
Lamech |
The despairing |
||
Noah |
Rest, or comfort |
(참조: http://www.khouse.org/articles/2000/284/)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족장들의 이름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문장을 보세요. 장구한 세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비장한 출사표가 보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저주받은 땅에서 고통하는 인생들이여
기다려라, 내가 내려 가겠노라
내가 내 생명을 내놓아
절망에 주저앉은 너희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리라.”
그리고 오늘 만날 아브라함은 바로 이 땅에 내려오시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기다리며 찾고 찾으시다가, 아브라함을 주목하여 부르시지요.
오늘의 말씀
창세기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게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Q1. 창세기 12장을 읽어보세요.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명령과 약속을 주셨습니까?
Q2. 창세기 15장을 읽어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서 4장 참조)
Q3.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은 이스마엘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기적처럼 낳은 이삭은 무엇을 예표합니까? 이들을 통한 이스라엘과 아랍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집니까?
핵심 짚어보기
아브라함, 그 위대한 이름의 탄생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 후손으로, 아버지를 도와 뚝딱 뚝딱 신상들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원전 2091년 경 그 시절, 아브라함의 나이 일흔 다섯, 어어쁜 아내와 함께 사뭇 평탄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그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는 먼저 죽은 형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 롯을 아들처럼 아끼며 위안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유대교(1400만), 이슬람교(16억)의 혈통적 조상이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범기독교(23억) 인구들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2013년 기준,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 자료 참조)
그 날, 아브라함은 진흙으로 정성껏 빚은 잘 생긴 신상을 가마에서 꺼내들고 바라보다가, 자기도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그 어떤… 역겨운 감정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이깟 사람 손으로 만든 흙덩이를 사 가서 신이라 모셔놓고 복을 비는 사람들이라니… 속으로는 비웃지만, 가진 것이 이 손 재주 뿐인지라 그 덕에 먹고 사는 자신이 더욱 환멸스러웠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평생 이렇게 살겠지… 저녁 노을을 보며 쓴웃음이 올라왔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
성경의 기록을 따져보면 노아는 홍수 후에도 350년 정도 더 생존하였고, 아브라함의 시기와 과히 멀지 않았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온 땅에 퍼진 인류는 아담과 노아의 자손들로서, 분명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인류는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가짜 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가나안 땅은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함의 아들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던 곳으로, 종교심을 발휘하여 온갖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그들은 성적 쾌락을 신성시하여 신전에서 여사제들이 매춘 행위를 하였고, 몰렉이라는 신에게는 자기들의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우상은 한 마디로 인간 탐욕의 화신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을 찾는 듯 보였고, 신을 기쁘게 하려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자연 재해의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사 잘 지어 잘 먹고 잘 사는 것, 오염되고 타락한 본성에 부합하는 쾌락을 충족시켜 줄 초월적인 힘을 추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개나 돌이킴은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참된 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빈 마음을 채우고 두려움을 회피하고자 하는 거짓된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은 능력이 인간보다 좀 나을 뿐, 종교의식이나, 희생 제물, 지켜야 할 규칙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면 되는 존재, 인간이 원하는 그 무엇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됩니다.
우상 숭배가 나쁜 이유는 참되신 하나님을 인간이 규정하는 거짓된 모습으로 제한하는 데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 무엇보다도, 인격 대 인격으로의 사랑의 관계성, 올바른 사귐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태양 안에, 달 안에, 나무의 모습으로, 소나 곰의 육체 안에 들어오실까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우상 숭배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자리를 거짓 것으로 대신 채우게 하므로 우리 인간에게 치명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도록, 그리하여 참된 사랑을 받고 또 그렇게 참된 사랑을 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헛된 우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채우고, 계속해서 죄악된 자신으로 고집스럽게 남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창조 목적대로 진리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사랑의 관계성을 가질 수 없게 되지요.
나에게 ‘나타나주신 하나님’
해가 다 기울고 땅거미가 내려앉도록, 아브람은 한 없는 상념에 젖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처음 듣는 음성, 처음 대하는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브람아, 익숙한 네 고향 땅, 친척, 네 아비의 집을 떠나라. 내가 네게 어디로 갈지 지시할 것이다. 네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마. 네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이 위대한 이름이 되게 할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 축복의 존재가 될 것이다”
생각지 못한 만남만으로도 충격을 받고 멍~해진 그는 그 말의 뜻을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믿기지 않을만큼 놀라운 이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확신 하나만 분명했습니다.
밤새 한 잠도 이루지 못한 아브라함, 그는 다음날 주저 없이 일어섰습니다. 만류하는 아버지와 친척들을 애써 안심시키고 아내와 조카 롯과 자기 종들을 이끌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다른 곳은 바로 가나안 땅. 그곳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세기 12:7)”
정신 없이 인생의 대 전환점을 돈 아브라함,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의 제단을 쌓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평생 우상을 만들며 어쩔 수 없는 거짓과 모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아브라함, 그런 자신에게 나타나주신 하나님, 커튼을 열어젖히고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 더군다가 그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인해 짙은 안개가 뒤덮인듯 막막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격과 소망의 태양빛이 찬란히 떠올른 것입니다.
길고 긴 인고의 시간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출발한 새 인생이건만,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에는 시련과 고난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심한 흉년을 만나고,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그만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사람들이 헤칠까 하여 비겁하게도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파라오가 사라를 손대지 못하도록 개입해주시는 바람에 겨우 아내를 되찾고 무사히 이집트를 빠져나오게 되지요. 하지만 20여년 후에도 약속의 땅을 떠났다가 아비멜렉 왕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롯을 떠나보내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조카 롯과도 관계가 틀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하나님은 친척도 모두 떠나라고 명령하셨지만, 혹시나 하나님 약속대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아들처럼 키우던 롯을 상속자로 삼고자 나름대로 방책을 세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리사랑은 외로운 법, 조카 롯은 삼촌의 마음을 몰라줍니다. 목초지 때문에 하인들이 다투어 결국 분가를 하게 되었는데, ‘네가 먼저 택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양보하는 삼촌 앞에서, 롯은 자기 눈에 좋아보이는 곳을 척하니 골라 떠납니다. 롯은 죄악되고 화려한 소돔으로 가까이 갔다가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위험을 무릅쓰고 기습작전을 펼쳐 롯을 구출했지만, 그래도 롯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졸지에 적만 잔뜩 생겨 두려움과 허무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한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기까지 화려한 세상의 향락에 취해 있다가 아브라함의 끈질긴 기도로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롯 때문에 두고 두고 마음을 쓰고 허무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놓아보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 이스마엘
부르심을 받고 떠난 지 어언 12년이 지났을 때, 아브라함은 조바심이 난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하갈은 아내 사라와 갈등을 일으키고, 이스마엘도 후에 얻은 이삭을 위협하여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하신 아들을 얻기까지, 믿고 기다리지 못한 채 인간적인 방법을 쓴 것은 다 실패가 되고 쓴 뿌리가 됩니다. 적자 이삭과 서자 이스마엘이라는 한 가정의 비극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 사이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는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로마서 9:7,8)”
내가 너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원대한 약속을 주셨지만, 결코 금새 쉽게 실현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무려 25년 세월을 기다리게 하시고, 인간적으로 의지하던 것들을 아프게 아프게 모두 끊어내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그렇게 시간을 끄시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초조한지 정녕 모르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실수할 때 뒷수습해주시고, 전쟁을 이기게 하시고, 적들 가운데서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마다 찾아오셔서 다시 한번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마치, 영적인 어린 아기를 베이비시팅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어느 수준까지 아브라함과 씨름하셨을까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인간적인 힘으로는 자식을 낳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리하여, 그 품에 안은 아들 이삭이 순전히 하나님의 기적이라 인정되는 그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 오랜 세월 약속 하나를 붙드는 믿음을 키우시며, 결국 이루어 내셨습니다. 품 속의 자식 하나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이 얼마나 오글거리는 멘트입니까? 그러나, 정말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연인에게 이런 고백을 들을 수 있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먼지보다 작은 우리 한 영혼에게 하시는 고백이라면… 이 하나님의 마음이 상상이 되나요? 헤아려 지시나요?
그림출처 http://abcparish.blogspot.kr/2012_02_26_archive.html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황송한 고백 앞에 아브라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밀당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참 황송하지만,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큰 것 바라지도 않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아직까지 아들 하나 없습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겠습니까? 혹시… 다메섹 출신 종 엘리에셀이 참 착실한데, 이 사람을 상속자로 삼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식을 이리 안 주시니, 저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걱정 마라. 네 몸으로 친 자식을 낳을 것이다.
그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15)”
노아 이후 수백 년을 기다려 점찍으신 아브라함은 과연 남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방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궁시렁 궁시렁 항의를 하던 아브라함은 밤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암, 그렇게 하시겠지. 늙은 이 내 몸으로 친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저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많은 자손이 생길 거라고? 와~ 대박이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이 너무나 기특하셨던 것 같습니다. 현실은 참 먼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을 넙죽 믿고 약속을 받아 안는 아브라함…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너 합격이다!’ 선포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늙은 몸을 생각하면, 호호 할머니가 되어가는 아내를 보면 조바심이 나고 도저히 안 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저 하나님을 믿은 것이지요. 믿음은 하나님을, 그 분의 능력을,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그 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요즘은 ‘믿음’이란 용어의 정의를 재정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교인들이 말하는 ‘믿음이 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의 내용은 묘하게도 당사자의 착실한 신앙 생활, 헌신의 정도를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이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게 하는 치명적인 함정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복음 진리의 중요한 특성을 알려줍니다. 로마서 4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건을 예로 들어 복음, 즉, 자격 없는 우리가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해 구원얻는 원리를 알려줍니다. 무릇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신앙인이라면, 자기 선행이나 종교적인 업적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일한 것이 없고 경건한 것이 없어도 다만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16)”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그 이후로도 아브라함 부부는 많이 엎치락 뒤치락 하였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때에, 오로지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삭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 백 세, 사라는 여인의 월경이 끊어진 구십 세의 일이었습니다. 두 부부도 믿기가 어려워 그토록 기다린 아들을 ‘내년 이맘 때에’ 주시겠다는 말씀에 ‘에이~ 하나님 유머 감각도 좋으셔~” 하며 몰래 키득 키득 웃은 그 웃음의 아들, 예기치 못한 기쁨의 아들, 기적의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1,12)”
아브라함 한 사람이 온 인류의 축복과 저주의 기준?
아브라함의 일생을 추적하며 살펴보면, 그는 많은 약점에도 불고하고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굳세게 붙드는 비범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의 사람, 싹수 있는 사람에 목마르셨다 한들,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삼으시다니… 좀 과하신 것 아닌가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12:3)”
아브라함이 인고의 세월에 지치고 곁길로 갈 때마다 하나님은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론 침묵과 엄한 경고로, 때론 한 없는 사랑의 말씀으로 나타나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 그 안에 담긴 인류 구원 계획이 보다 구체화됩니다.
예를 들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이끌어내신 지 10년이 지났을 때, 의지하던 조카 롯이 멀어졌을 뿐, 계속해서 자식이 없어 초조해할 때,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15:4)’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라가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집안의 질서가 흔들린 뒤에야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해 주실 후손이 약속의 자녀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어려운 시험에서 합격했을 때에는 하나님은 더 구체적인 예언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22:16~18)”
여기서 ‘네 씨’는 앞서 창세기 3:15에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과 같이 여러 후손들과 대비되는 단수형으로서 특정한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예언은 아브라함을 계승하는 이삭과 야곱, 요셉을 비롯하여,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 왕을 비롯하여 여러 선지자들에게 줄기차게 말씀해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12장 3절의 약속은 멀고 먼 후손으로 오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실, 하나님이 오랜 세월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으로 통해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온 세계, 천하 만민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점을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니… 왜 그런 걸까요? 도대체 예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시길래 그런 걸까요? 나의 영원한 운명을 가를 예수님, 알고 싶지 않으세요?
일러스트 : John Song
팡세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적으로 포기할 상황에서, 뜻밖에도 더 크고 귀한 것을 얻은 경험이 있다면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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