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퀴즈 : 또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을까요?
에리히 오저의 만화 <아버지와 아들>, 1934~37년 (좌), 개그콘서트 <아빠와 아들> (우)
영화 <사도>, 2015 (좌), 아브라함과 이삭, 램브란트, 1634 (우)
조성욱님 페북에서 본 동영상도 공유합니다:
오늘의 말씀
창세기 22:8,13,14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Q1. 창세기 22장 1~18절을 읽어보세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시험이 무엇이었나요?
Q2. 모리아 땅은 역사적으로 어떤 곳입니까?
Q3. 번제할 어린 양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어떤 예언적 성격이 있습니까? 이삭을 바치라는 테스트는 훗날 어떤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나요?
Q4.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 임마누엘을 목적으로 하는 성전의 기능, 예수님을 통해 활짝 열린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해 묵상해 보세요.
핵심 짚어보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
아브라함은 저 멀리 이삭이 엄마와 햇살 아래서 양털을 쓰다듬으며 수다 떠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이삭은 봄날에 피어오르는 연둣빛 새 잎처럼, 외양간에서 뛰어나온 어린 송아지처럼 온 몸으로 사랑받는 자의 기쁨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반신반의하며 엎치락 뒤치락 하는 그에게, 거듭 약속을 주시고,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기적처럼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씀, 아브라함은 충격으로 머리가 멍~ 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인신 제사는 당시 이방 민족들의 다양한 우상숭배의 행태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가증한 죄악이라 하시며 이스라엘 중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히 금하셨습니다. 아무리 종교심의 발로라 하더라도 힘 없는 자녀의 생명을 자기 소유물처럼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이 정비되기 이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테스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외아들을 어떻게… 더군다나 이삭은 하나밖에 없는 약속의 아들, 그로 말미암아 큰 민족이 나오고,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을 주실 아들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고민하던 아브라함은 이제껏 그가 겪고 체험한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왕들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 불가능한 가운데 기적으로 아들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분,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뢰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시험하신 후, 죽은 아들을 도로 살려주실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기적처럼 그런 믿음이 그의 마음 복판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창세기 11:17~19)”
이는 하나님께서 지난 수십년 동안 아브라함을 베이비시팅하시며 일궈내신 열매요, 어찌보면 이삭을 얻은 것보다, 그 모든 승리와 축복을 누린 것보다 더 어려운, 아브라함 인생에 있어 가장 킨 기적이었습니다. 일찌기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참되신 하나님,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선물로 얻은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곳, 모리아 산에서
그러나, 지나놓고 보니 이렇게 마음 편이 전체를 조망하며 논할 수 있는 것이지, 그 과정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의 갈등과 번뇌의 과정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곧장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22:3)”
아브라함 자신은 믿음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아내 사라에게, 아들에게,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그 뼈가 깎일 듯한 고통을, 아들이 맛보아야 할 충격과 공포와 두려움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요? 선하신 하나님,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믿지만, 그게 언제일지, 어떻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시각각 찾아드는 회의와 슬픔과 걱정을 떨쳐내고자 이를 앙다물고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그렇게 사흘 길을 왔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멀리 모리아 땅이 보였습니다. 그는 사환들을 뒤에 남아 기다리라 하고 남은 길은 이삭만 데리고 떠났습니다. 번제의 뗄감 나무짐을 아들에게 지우고, 자기 손에는 불과 칼을 들었습니다. 심각한 아버지 표정과 침묵에 눌려 있던 이삭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은 시선을 외면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창세기 22:8)”
그리고는, 어느새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았습니다. 이제 희생 제물로 드릴 양을 잡아 올려놓아야 할 차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등 뒤로 단단히 붙잡더니 밧줄로 묶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세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당혹스러워하는 아들의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몇 초였을까… 태어나 처음 보는 강렬한 아버지의 눈빛… 애절한 호소같기도 하고, 슬픔같기도 한, 그러나 비장하고 결연한 눈빛은 수백 마디의 말을 쏟아내듯 했습니다.
설마… 설마!!! 이삭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이삭의 눈빛을 읽은 아버지의 눈에 아주 잠깐 눈물이 비쳤던가… 그러나 이내 손아귀에 힘을 주며 이삭의 등을 돌려대러 다시 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은 온 몸에 힘이 풀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틈날 때마다 “너는 우리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냐. 하나님이 기적처럼 주신 아들이야” 하며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달뜬 얼굴,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벅찬 얼굴이 아른거렸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내놓으라 하셨나요?’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잃고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어떻게 버티실까 생각하자, 참으려 해도 꾸역 꾸역 통곡이 터져나왔습니다. 아들의 울음 소리에 아브라함의 눈에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곧 다시 만나 그 때 얘기하자꾸나… 심호흡을 하고, 칼을 번쩍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향해 찌르려는 순간!
El sacrificio de Isaac (이삭의 희생), Pedro Orrente, 1616.
여호와 이레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의 앞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내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2:12)”
아, 나를 테스트하신 것이구나, 정말 죽이라고 하신 게 아니었구나~
합격 통지를 받은 아버지와 아들은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어디선가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한 대로, 과연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어린 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 그 양을 가져다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여호와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인간 종교의 한 문화였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극히 싫어하시던 인신 제사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신 이런 이상한 일이 왜 벌어졌을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 이런 방법을 쓰신 것일까요?
사실, 창세기 22장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이 주된 목적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을 본받자는 교훈을 얻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격입니다. 이 사건을 일으키시고 또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여호와이레의 하나님, 여호와의 산에서, 진짜 희생양을, 친히 준비하실 하나님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곳,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기 위한 성전
아브라함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이 모리아 산의 테스트 사건은 유대인과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모두에게 중요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훗날 이 산에서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는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었고, 예수님 시대에는 유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시던 바로 그 예루살렘 성전이지요.
물리적인 성전은 예수님 예언하신 대로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파괴됩니다. 그리고 AD 7세기에 들어서는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어 폐허로 있던 중, 636년, 이슬람의 예루살렘 점령 후 이슬람의 황금 돔(Dome of the Rock)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사원 내부의 중앙에는 이삭을 바치려 했다는 (이슬람에서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주장함) 바로 그 바위가 있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Dome_of_the_Rock)
그러나, 아무리 성스럽고 찬란한 영광을 자랑했어도, 인간들이 아무리 성지라 떠받들며 탈환전을 펼쳐도, 예수님은 ‘진짜는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시장통으로 변질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시며 장사치들을 내어쫓으실 때, 항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놀랍게도 먼 훗날,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이라 불리게 된 이 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던 그 양은,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었지요. 아브라함과 이삭 말고 또 한 쌍의 아버지와 아들이 있어, 번제할 어린 양을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여호와이레의 예언은 그렇게 성취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께서정하신 방법, 성전, 그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허무시고 진리 가운데 기뻐하며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참된 사귐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그 날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청사진이 아브라함 때에 여호와 이레로 계시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 후에 이루고자 계획하시는 어떤 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순간마다 저며오는 아픔에 속울음을 삼키시며 아브라함과 이삭을 내려다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도 그 날의 그 잔인하고 처절한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함께 아파해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리아 산의 테스트를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터널을 통과하며, 그 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번 상기하고, 믿음의 순종을 드리고, 선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아픔, 즉, 죄인들의 죄값을 치르는 일에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삭 역시,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형벌 받으신 성자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 그 고독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아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날, 아브라함과 이삭만은 하나님 곁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며 또 다른 한 쌍의 아버지와 아들의 슬픔을 함께 아파해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하나님의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이레, 일러스트 : John Song
팡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서 소중한 것을 요구하시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이 있나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라면, 당신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자 하실지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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