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탐구: 손양원 목사님
언젠가 우연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소원이 무어냐’ 묻는 아나운서의 말에 누군가가 솔직 담백하게 ‘돈’이라 대답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돈도 좋지요. 하지만 저라면 ‘사람들이 원한과 증오를 풀고 용서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고통하게 하는 크고 작은 원한들, 그 누가, 어떤 물질적인 보상으로 그 원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로봇도 아니고… 요술처럼, 마술처럼, 우리 마음의 고통과 원한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용서하고, 그 죄악을 잊어버리게 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위의 동영상은 2014년 성탄 특집으로 방송된 내용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더 나아가 양자로 맞아 키웠습니다. 그 용서의 힘, 행동하는 사랑은 어떤 힘에 의해 가능케 된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이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Q1. 창세기 37장을 읽어보세요. 요셉의 꿈은 왜 비웃음과 미움을 샀습니까? 형들은 왜 요셉을 이집트 노예로 팔아넘겼습니까?
Q2. 창세기 38장을 읽어보세요. 유다에게 일어난 비극은 무엇입니까? 이를 통해 유다는 어떤 사람으로 변했나요?
Q3. 창세기 39~41장을 읽어보세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요셉은 어떻게 형통할 수 있었습니까? 요셉이 어떻게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나요?
Q4. 창세기 42~45장을 읽어보세요. 요셉이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가며 확인하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결과, 변화와 회개, 용서와 관계 회복의 과정을 살펴보세요.
핵심 짚어보기
오늘의 주인공은 꿈쟁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거듭 보여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 때문에, 요셉은 그 꿈이 너무나 아득하고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험난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요셉이 참 대단한 것은, 억울하고 고생스러운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마침내 그에게 주신 꿈을 이루십니다. 요셉 자신이, 그리고 그를 미워했던 형들이 어떻게 변화되어가는지 살펴볼까요?
요셉의 꿈
요셉은 야곱이 일편단심 사랑한 라헬이 낳은 늦둥이였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비싼 채색옷을 입혀주며 아주 대놓고 편애를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눈치 없고 순진무구한 요셉은 형들이 못된 짓을 하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습니다. 형들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요셉은 이상한 꿈을 연거푸 꾸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습니다. 형들이 묶은 곡식단들이 자기가 묶은 곡식단에 일제히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자기별에게 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암~ 귀엽지요?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세기 37:8)”
억눌린 미움이 폭발할 때
한번은 형들이 양떼들 풀을 먹이려고 멀리 세겜 땅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요셉에게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요셉이 세겜에 당도했을 때는 형들은 도단이라는 곳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 때 꾀를 피우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실한 요셉은 물어 물어 도단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오래도록 품은 미운 감정이 폭발하며, 차마 해서는 안 될 못된 짓을 꾸몄습니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께는 사나운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요셉의 꿈(좌),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 Friedrich Overbeck (1789-1869) (우)
아무리 배다른 형제들이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야곱의 차별대우가 그들에게 오래도록깊은 상처를 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권위 앞에서는 속마음을 숨겼으나, 기회가 오자 그간의 미움과 증오가 발톱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도 장남의 책임감으로, 르우벤은 아우들에게 손에 피를 흘리지 말자고 겨우 설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물이 마른 빈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살려달라고 울부짓는 요셉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태연히 요셉이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넷째 유다의 주동으로 지나가는 상단에게 요셉을 팔아넘겼습니다. 미성년자 노예의 몸값, 은 스무냥을 챙기고 양을 잡아 요셉의 채색옷에 뿌리며 아버지에게 둘러댈 말도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열 형제는, 평생 가슴에 짊어질 끔찍한 범죄의 공모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들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피묻은 채색 옷을 보이며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먹은 것 같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까맣게 속아 한 없는 슬픔의 심연으로 떨어져야 했습니다. 자신의 비뚫어진 사랑이 이토록 큰 비수로 와 가슴에 꽂힌 줄, 야곱이 상상이나 했을까요.
노예에서 죄수로
갑부집 아들, 그것도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열 일곱 소년 요셉은 하루 아침에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허망한 개꿈으로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절망스러운 현실 상황의 빛깔에 어울리지 않게, 성경은 요셉의 삶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2,3)”
요셉은 그가 섬기던 파라오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온 집을 관리하는 총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했고,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보디발의 모든 소유마다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형들에 대한 배신감과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해가 밝으면 또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한 요셉, 정말 대견합니다. 그렇게 이집트 타향 살이, 노예 살이에 적응해가며 자기 입지를 다져가는가 했으나…
어림 없다는 듯, 더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보디발 여사가 준수한 용모의 멋진 청년 요셉을 탐내다가 뜻대로 안 되자 요셉을 강간미수범으로 모함한 것입니다. 그 동안 슬픔과 설움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했건만, 다시 감방 신세가 되고 말았을 때, 얼마나 기가 막히고 절망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상황에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39:21~23)”
죄수에서 잊혀진 존재로
어느 날, 요셉이 갇힌 감옥에 파라오의 직속 신하 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감옥 책임자는 요셉에게그 두 사람을 보필하도록 맡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심란을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듣고는 바로 해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파라오의 생일에, 요셉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어 한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한 사람은 복직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복직되어 나가는 신하에게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알려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직된 신하는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려도, 한 달을 기다려도, 일년, 이년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인간의 눈에 요셉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것이요, 억울하고 절망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요셉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던 요셉은 여러 환난의 도가니 속에서 정금처럼 연단되고 있었습니다.
죄수에서 이집트의 총리로
요셉의 인생에서는 꿈이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이번에는 파라오가 연거푸 심란한 꿈을 꾸었습니다. 포동포동 살진 소 일곱을 너무나 파리하고 흉측한 소 일곱이 잡아먹는가 하면, 무성하고 충실한 이삭 일곱을 피들피들 말라비틀어진 이삭 일곱이 삼켜버렸습니다. 파라오는 내노라 하는 이집트의 마술사, 박사들을 다 불러 모았지만 꿈을 해몽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파라오의 꿈 (좌), 파라오 앞에 선 요셉 (우),
그림 출처 : http://dailytruthbase.blogspot.kr/2011/09/genesis-39-41-from-pit-to-pinnacle-of.html
그제서야 전에 복직됐던 신하가 꿈쟁이 요셉을 기억해내었습니다. 그의 추천으로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은 갑자기 파라오 앞에 불려나가게 되었습니다. 꿈 내용을 들은 요셉은 칠년 대풍 후에 칠년의 큰 흉년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풍년 든 해에 양식을 부지런히 비축하여 대흉년 7년동안 쓰게 해야 한다며 정책 방향까지 제시하였습니다.
흡족해진 파라오는 요셉이 ‘신의 영에 감동한 사람, 가장 명석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며 그를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릴 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자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고,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 당한 불쌍한 히브리 노예, 억울한 죄수의 자리에서 대국 이집트의 총리로 급부상한 것입니다.
형들의 죄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
과연 요셉의 말대로 7년 대풍 후에 7년의 심각한 기근이 닥쳤습니다. 이집트뿐 아니라 주변 각국, 야곱 일가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요셉 덕분에 이집트만은 양식이 넉넉히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야곱은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어 양식을 사오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요셉의 친동생 베냐민만은 무슨 일이 생길까봐 집에 남겨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양식 문제를 꼬투리로 열 형들의 죄 문제를 다루십니다. 또한 “우리가 죽이면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 하던 형들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작품과 조우하게 됩니다. 창세기는 42~45장의 긴 분량은 요셉을 통해 형들의 죄문제를 다루시는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대번에 알아보았지만 열 명의 형들은 이집트 총리로 근엄하게 서 있는 인물이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인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시치미를 떼고 그들은 스파이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언급한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면 한 집안 형제라는 주장을 믿어주겠노라 엄포를 놓았습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나면, 인간은 심연에 묻어둔 깊고 깊은 죄의식이 표면에 떠오르는 법, 형들은 당황스럽고 답답한 마음들을 이같이 토로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세기 42:21)”
형들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히브리 말을 알아듣는 요셉은 감정이 복받쳐 급히 혼자 울 곳을 찾아들어가야 했습니다. 요셉의 목적은 그들을 괴롭히고 벌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표로 시므온만 볼모로 잡고 양식을 바리 바리 싸주어 돌려보냈습니다.
유다의 약속
시므온을 뒤로 하고 아홉 형제가 돌아와 자초지종을 고하자, 야곱은 기가 막혔습니다. 양식이 또떨어지고, 이제는 베냐민을 데려가야 했지만, 야곱은 요셉을 잃은 것도 모자라 시므온도 잃고, 막내 베냐민까지 위기에 내몰 수 없다며 역정을 내었습니다. 큰 아들 르우벤이 “아버지, 제가 막내를 아버지께 무사히 데려오지 못하면 제 두 아들을 죽이세요.” 하고 큰소리쳐 봤지만, “니 시방 그게 말이니 방구니?” 하며 무안만 당했습니다. 팽팽한 입장 차로 매일 매일 똑같은 입씨름만 반복되던 어느날, 네 째 아들 유다가 나섰습니다.
“베냐민을 함께 보내주셔야 양식을 사올 수 있고, 그래야 이 어린 것들이 다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베냐민을 책임지겠습니다. 만약 제가 무사히 베냐민을 아버지 앞에 데려오지 못하면… 제가 영원히 그 죄를 지겠습니다. (창세기 43:8,9)”
야곱은 그제서야 ‘잃으면 잃으리라’ 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베냐민을 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2차 이집트 방문…
구류되었던 시므온과 베냐민까지, 열 한 형제가 이집트 총리 요셉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바로, 요셉의 오래 전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보자 요셉은 마음이 타는 것 같아 급히 울 곳을 찾아들어갔습니다. 그는 스파이로 오해하여 미안하다며 열 한 형제를 풍성히 대접해 주었습니다.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 대한 중요한 테스트를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식을 사서 돌아가는 형제들 중, 일부러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감추어 도둑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베냐민만 노예로 남고, 죄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도 좋다며 미끼를 던졌습니다.
배다른 형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이, 요셉의 친동생이자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베냐민의 시련 앞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었습니다. 그 동안 라헬만 자기 아내인 양,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만 자기 아들인 양 대놓고 편애를 했던 야곱,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아들들에게 얼마나 자괴감에 시달렸을까요. 예전같으면, 그들은 뭐 안 됐지만 어쩔 수 없네 하며 베냐민을 팽개치고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형들은 긴 세월 동안 달라져 있었습니다. 형들은 베냐민을 이집트 종으로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땅이 꺼져라 슬퍼하며 베냐민과 함께 요셉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저 베냐민을 잃으면 어쩌나, 그러면 아버지가 또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염려 뿐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 앞에서 ‘베냐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약속했던 유다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슬 퍼런 이집트 총리 앞에 나서서, 베냐민이 늙으신 부친께서 아끼시는 특별한 아들이며, 그를 잃으면 아버지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버리실 것이라고 겸손하고 간곡하게 탄원하였습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하나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저 아이 없이 돌아가면 저희 아버지가 너무 슬픈 나머지 돌아가실 것입니다. 극구 안 보내려는 아버지께 제가 아이를 책임지겠노라고 맹세하고 예까지 온 것입니다. 부디 제가 대신 종이 되게 하시고 저 아이는 형제들과 함께 돌려보내주소서 (창세기 44:30~33 요약)”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유다는 어떻게 이렇게 희생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창세기 38장에는 요셉의 이야기의 삽입구처럼, 네째 형 유다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넘긴 죄책감에서였는지, 그는 집을 떠나 유랑했습니다. 그러다 가나안 여인을 만나 살림을 차리고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그만 일찍 죽게 됩니다. 당시는 아들이 없이 대가 끊기는 것을 큰 문제로 여겼던 시대로서, 계대 결혼, 즉,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맏아 처음 난 아들은 죽은 형의 아들로 인정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과부가 된 다말은 그 둘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동생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일부러 땅에 설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 둘째는 곧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덜컥 겁이난 유다는 다말이 자기 아들들 다 죽이는 재수 없는 여자라 생각하고는 ‘막내는 아직 어리니 크면 부르마’ 하고 둘러대고는 친정으로 소박을 보내었습니다. 다말은 막내가 장성해도 시아버지가 자신을 부르지 않자, 유다의 의중을 눈치 채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유다가 아내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운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바로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에게 접근하여 근친상간을 하여 아들을 얻는 것이었죠.
유다는 과부 된 며느리가 수절을 지키지 않고 어디서 임신을 했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유다의 도장과 지팡이를 받아둔 다말의 지혜로 인해, 며느리를 임신시킨 장본인이 바로 유다 자신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며느리를 속이고 세째 아들의 계대 결혼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 아내가 죽었다고 창녀와 관계를 한 것, 그러고도 며느리의 음행을 엄벌로 다스리려 한 위선… 유다는 정말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끌려나오는 다말이 그의 도장과 지팡이를 제시했을 때, 유다는 깨끗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창세기 38:26)”
유다는 일찌기 요셉을 이집트 노예로 팔자고 주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해야 했는지 옆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 자신이 두 아들을 잃어보았는데… 그는 베냐민까지 잃고 슬퍼할 아버지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노예가 되어서라도 베냐민을 그 아버지 품에 안기도록 하기 원했습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진 유다의 변화, 자신을 노예로 내어주며 베냐민을 변호하던 유다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야곱의 예언적 기도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8,10)”
이스라엘 역사상, 유다의 후손 중에 다윗 왕과 솔로몬이 나오고, 왕의 혈통이 남유다로 이어졌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통로가 됩니다. 며느리 다말의 이름 역시 자존심 쌘 유대인들이 펄쩍 뛸만한 문제의 여인 5총사 중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버젓이 올랐습니다(시아버지와 근친상간하여 자식을 본 여인 다말, 가나안 정복 전쟁 시의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 본토박이가 아닌 이방여인 룻, 우리야의 아내로서 다윗왕과 간음한 밧세바, 요셉과 약혼 상태에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 마태복음 1:1~17). 유다와 다말의 이름은 죄악 가득한 곳에 임하여 인간의 허물과 실수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용서와 구원, 해피 엔딩을 가져오다
유다의 진정성 있는 탄원에 요셉은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형님들, 저에요. 저 요셉이에요~” 하며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는 북받치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어 궁궐이 떠나가라 하고 울었습니다. 너무나 놀라 말문이 막힌 형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노예로 팔아넘긴 과거 때문에 걱정하지는 마세요. 자책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 온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 나를 이집트로 보낸 것이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45:5~8 요약)”
요셉과 베냐민의 상봉 (그림 출처: KCM)
형들은 요셉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서로 끌어안고 울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야곱도 노구를 이끌고 이집트로 왔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 이집트의 총리로 상봉을 하게 되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이렇게 하여, 연속되는 흉년을 피해 70명에 이르는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찌기 선조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오게 될 것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13,14)”
이집트인들은 목축업을 혐오하여, 야곱 족속은 고센이라 불리는 독립된 지역에 따로 정착하였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여호와 신앙을 지키고 순수 혈통, 히브리 민족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 곳에서 사백여년을 있으며, 야곱의 집안은 2백만 히브리 민족으로 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총애를 받던 요셉이 죽고 그의 공적이 기억에서 잊혀지자, 히브리 족속은 노예 민족으로 전락하여 400년을 고생하다가, 훗날 모세의 지도로 출애굽하게 되지요.
요셉은 억울한 고난만 겪은 듯 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이 상황을 꼬이게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운명도, 심지어 사람의 악한 의도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를 원한과 어두움의 자리에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이 힘이 되어 그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끝없는 터널을 지나는 듯 캄캄하던 그 시간들 속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지키시고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를 높이시고 그에게 주신 꿈을 이루셨습니다. 길고 긴 구속사에서 히브리 민족을 태동시키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낸 사람 요셉,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배반 당했으나 사랑과 용서로 오히려 구원을 가져다 준 사람 요셉은 동족에게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순간에도 용서의 기도를 올리시던 구원자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34a)”
일러스트 : John Song
팡세
억울하거나 부당한 상황에서 악으로 악을 대항하지 않고 선으로 승화한 경험이 있다면 적어보세요.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결과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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