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모집하였습니다. 사울왕을 피해 적국 블레셋 땅에 들어가 살던 다윗에게 진퇴양난의 위기가 닥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거짓말하고 아첨하고 연기를 해낸 덕분에 블레셋 아기스 왕의 신임을 얻은 다윗에게 참전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동족에게 칼을 겨누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되었지요
한편, 사무엘도 죽고, 다윗도 곁에 두지 못한 사울은 블레셋이 침공하자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사울은 전쟁을 앞두고 여호와께 여쭈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꿈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묻을 때 쓰는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급해진 사울은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았습니다.
사실, 사무엘의 죽음에 온 이스라엘이 애도를 할 즈음에,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경건하고 믿음 있는 영적인 개혁 같았지만, 분위기를 타며 인기를 얻기 위한 정치적, 종교적 쇼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위기 앞에 몰래 무당을 찾는 사울의 행동이 이를 고발하고 있지요.
이미지 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Qkj&articleno=1273
그는 미디어 앞에서의 말과 실제 삶이 다르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갈 때 꽁꽁 변장을 하고, 밤에 몰래 갔습니다. 사울 왕의 서슬 퍼런 종교 개혁 정책을 본 마당에, 무당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며 거절하는데도, 사울은 절대 안전할 것이다 안심시키며 사무엘의 죽은 혼을 불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무당이 묘사하는 인상착의를 들으니 정말 죽은 사무엘의 혼이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속임수였지요. 사울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심히 다릅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상 28:15)”
사무엘처럼 보이는 존재는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다’,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다’며 직언을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또한 그의 원인 진단과 결과에 대한 얘기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28:18,19)”
블레셋에 패배하고 자신과 아들들이 죽게 된다니… 이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악한 영이 사무엘 행세를 한다 하더라도 내용은 너무 그럴듯해 보입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고 죽은 혼을 불러내고 그로부터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엄격히 금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초혼된 존재는 마치 진짜 사무엘의 영인 양,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양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도 사용하셔서 뜻을 알려주시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고,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 사울처럼 신접한 여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차선책이라도 된다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사울에게 선포된 메시지에는 죄에 대한 지적과 멸망, 심판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멸망길로 치닫는 사울에게는 불순종한 과오, 그래서 심판과 파멸이라는 결과만 보였고, 그게 현실의 전부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사울의 눈에는 그것만이 진리요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점입니다. 악인은 죽어가는 순간까지 자신의 오류 투성이 지식을 진리의 전부로 알고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책망과 훈계를 넘어 선 용서와 구원의 소식, 회복의 소식, 소망의 약속입니다.
사울이 진창을 뒹굴고 있는 시각, 다른 쪽에서는 다윗이 뻘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끝까지 거짓 충성심을 연기해 보였고, 이것이 먹혀 아기스의 신임이 하늘을 뻗쳤습니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29:3)”
하지만 신하들이 다 들고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나간다면 적으로 돌아설 것이라며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다윗은 사뭇 섭섭한 듯 아기스에게 립 서비스를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29:8)”
다윗은 끝까지 아기스의 신뢰를 얻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이 아기스의 신하들의 객관적인 판단력을 쓰셔서 그의 참전이 무산되게 도와주셨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모두 불신앙과 비겁한 거짓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처럼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그 아내를 파라오와 아비멜렉에게서 구원하신 것처럼,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상황에서도 야곱을 라반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처럼, 그의 허물과 실수를 가려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일 수도 있고, 반대로 다윗이 그래도 평소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를 세우시고 쓰시기로 작정하신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알기 어려운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인과 관계, 선후 관계가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25,26)”
우리가 모두 이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길 기도합니다. 엄연한 우리의 범죄와 죄과와 수치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형벌 받을 자들에게 오히려 용서를 베푸시고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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