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눅 20:20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막 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사뭇 어울리기 힘든 그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로 반목하던 이들조차 한 가지 목적,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한 뜻이 합하여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묘책을 짜내었습니다. 그들이 낸 아이디어는 실정법 위반을 유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통치하게 있고, 사법권과 실질적인 형 집행권이 예수님을 타격하도록 작전을 짠 것입니다.
막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발톱을 숨기기 위해,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합리적이고 열린 눈을 가진 것마냥 위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되시고, 외로모 차별하거나 선입견에 갇히지 않은 훌륭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이지만, 이것이 바로 듣는 이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평가였을 것입니다.
연막을 깐 후, 그들은 설계한 올무를 놓았습니다. 로마 통치 하에서 시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예수님의 견해를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말하자면 준거 집단, 이스라엘 민족의 신념과 외부의 더 큰 힘으로 작용하는 실정법이 상충되는 대목을 딱 짚은 것입니다. 인정과 명성을 지켜내야 하는 민중의 마음을 얻는 것과 로마 통치에 대한 반역자로 낙인 찍히지 않아야 하는 것 사이에 예수님을 옴짝 달싹 못 하게 가두고, 적어도 쩔쩔 매는 그 비겁한 모습을 군중들 앞에 폭로시킬 수 있는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막 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종교지도자들, 헤롯당의 협잡꾼 같은 정치인들이 자기들 수준으로 공격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하고 민중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로마 총독, 아니 황제라 할지라도, 세상 그 어떤 권세자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왕자의 권세와 품위를 당당히 유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데나리온은 로마 제국의 화폐로, 그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공식적으로 이 화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막 12: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눅 20:26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셨습니다. 또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둘 다 우리가 그 법도를 따르고 준수해야 함을 긍정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무엇입니까?
데나리온에는 로마 황제 시저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과 선민 의식이 투철한 정서상, 가이사를 인정하고, 가이사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은 치욕이요, 굴욕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위치에 서서,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외압에 항거해야 하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해 아래 인간 시스템의 불완전함,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민족적, 신앙적 정통성을 지닌 통치 체제라 하더라고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들이 증명해 줍니다.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더 큰 권위, 완전한 권위,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발 디디고 사는 그 땅의 통치, 그 시대의 사람들 간의 합의와 힘의 관계, 그 불완전하고 모순된 체제 안에서, 약하면 약한 대로 타협하고 살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이 가이사의 것이요, 가이사에게 바쳐져야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는 바로 사람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거듭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성도입니다. 성도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심히 혼란스럽고, 교회 안에서조차 정치적 갈등이 첨예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옹호하거나 굴종해야 하는 존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어떻게 해도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정치 체계, 누굴 세워도 한계적인 인간 제도에서, 교회는 세상 정권, 세상 통치자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거기에 큰 기대나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자유와 질서를 위해 권력자들의 통치의 홀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지켜주시길 기도하며 다른 일, 교회의 본연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 가운데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하나씩 하나씩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내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혹 비판을 하고 항거를 하자면, 세상 기준에만 피상적으로 맞춰가는 자신에 대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애통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충돌될 때, 연약하여 세상에 타협하는 자신을 애통해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충돌과 대격돌이 불가피함을 알고, 매일 매일에, 그리고 결정적인 때가 올 때, 세상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택해야 함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존재,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발을 딛고, 불신자들과 뒤섞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로서, 둘 사이에 어떤 상충이 있는지, 하나님의 통치는 이 유한하고 부조리한 세상 나라를 통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는 눈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하늘나라와 세상나라, 두 가지 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서, 오늘 여기, 땅에서 할 일, 하늘 시민으로 할 일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땅의 죄악,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에서 나의 불충함을 보고 회개하며, 더욱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 역사에 매진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도 많은 것이 모자라고 부족한 자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기도 벅찬 자입니다. 사회 부적응자, 철학병이 걸린 자, 신기루같고 무의미한 세상 부귀 영화를 위한 전력질주에 더 이상 부릉 부릉 시동이 걸리지 앉는 무력한 저를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해 위의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소망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저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또한 나의 무력함과 위협적인 대적들이 지지고 볶는 이 신비로운 무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을 보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삶과 전 존재를 주님께 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날마다천국한잔::사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복음서] 227.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막 12:28~34) (4) | 2024.10.02 |
---|---|
[사복음서] 226. 부활에 대한 질문 (마 22:23~33, 막 12:18~27, 눅 20:27~40) (2) | 2024.10.01 |
[사복음서] 224. 혼인 잔치의 비유 (마 22:1~14, 눅 14:16~24) (6) | 2024.09.18 |
[사복음서] 223. 모퉁이의 머릿돌 (마 21:42~46, 막 12:10~12, 눅 20:17~19) (0) | 2024.08.31 |
[사복음서] 222.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마 21:33~41, 막 12:1~9, 눅 20:9~16) (2) | 2024.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