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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천국한잔::사복음서

[사복음서] 224. 혼인 잔치의 비유 (마 22:1~14, 눅 14:16~24)

by songofkorea 2024. 9. 18.

오늘 본문은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맥락은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상황이요, 사건의 핵심은 미리 청했던 사람들이 오기 싫어하고 더 나아가 그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진멸하고 새로운 하객들을 모아간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천국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원래 누가 초청을 받았고, 그들이 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후 새로이 초청받은 자들이 어떤 예복을 갖추어야 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1년 전에 미리 초청을 하고, 오겠노라 한 명단을 확보해놓고 있다가 혼인 예식 때에 다시 종들을 보내어 다시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절차를 따라 사람들에게 일정을 알려 준비시키고 산해진미로 정성껏 음식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겠다던 사람들이 갑자기 갖가지 핑계를 대며 참석을 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14: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언뜻 보면 1년의 시간이 지나 다 상황이 변하고 바쁜 일이 생겨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데, 이들은 옹색한 핑계를 대었고, 돌아보지도 않았다는 표현, 다 일치하게 사양했다는 표현을 보면, 임금의 초청, 그에 대한 약속을 소홀히 여기고, 더 나아가 임금의 아들의 잔치에 참석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 표현을 보면 확실합니다.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혼인잔치에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이지, 왜 보냄 받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이쯤 되면, 이 비유가 옛날 옛날에 하는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를 들어 풍자해내고자 하는, 특수한 현실 상황을 반영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은 하나님이시요, 혼인잔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맞아들이는 천국 잔치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먼저 초청을 받고 아멘!으로 화답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그것입니다. 그들이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되시고 그들과 함께 하겠다 하신 말씀 그대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자손손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핍박하고 메신저들의 입을 막고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며 거역하였습니다.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것이 왜 이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까? 

앞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에서처럼,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때에도 그 아들마저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고 용서와 회복을 베푸는 구원자를 거절한 그들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용서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저, 그들이 마땅히 받았어야 할 심판과 저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처음 청한 사람들은 임금의 잔치에 초청받을 만한 고관대작들, 품위있는 사람들, 적어도 사회적인 결격 사유가 없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본심이 드러나고, 임금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옛 언약, 사람의 의로는 임금과의 함께함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눅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4: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눅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임금은 계속 혼인 잔치에 사람 채우는 것에 집착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비유에는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들이 겹겹이 이어집니다. 

임금에게는 아들의 혼인잔치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처음 초청받은 자들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 판명 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하고 처음 대상들이 실패했다고 해서 임금의 계획과 뜻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뜻하신 대로 기필코 그의 교회를 만들어 내시고 신부처럼 맞아들이십니다. 누가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됩니까? 어떤 자들이 신부로 부르심을 받습니까? 

두 번째 초청 대상들의 특징은 그들의 자격 여부, 사람의 어떠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빨리, 급하게, 시내와 거리와 골목에서, 산울가로 나가서, 강권하여 잔치 자리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가난한 자들, 장애인들, 눈 먼 자들이 언급됩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자리에 초청받는 확률이 적습니다. 감사함으로 기꺼이 응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자들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누구든 다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적인 자격으로 보면 맞습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일반인들 사이에아무리 멸시 천대 받는 자라도, 임금의 잔치에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절당하는 자들, 참여할 수 없는 부류가 있습니다.  

 

눅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먼저, 처음 청함을 받은 자들, 그러나 잔치에 오기를 거절하고 임금이 보낸 사자들을 능멸하고 핍박한 자들은 '하나도' 그 잔치를 참여하지 못하고 그 기쁨과 풍성함을 맛보지 못합니다. 이는 실패한 육적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율법과 자기의는 임금의 잔치를 거절할 뿐이요, 임금 측에서도 용납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가인의 자기의를 들고 나아간 제사, 오늘날까지 자신의 어떠함을 살피고, 참한 것, 그 중 나은 것들로 한껏 꾸미고 나아가려는 자들은 이런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REJECTED!!!' 

 

두번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복은 혼인잔치의 주체측이 하객들에게 제공해주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하릴 없이 쭈그러져 있던 인생들, 병들고 가난한 자들, 장애자들, 거렁뱅이 노숙자들 할 것 없이, 잔치에 걸맞는 복장을 하고 마음껏 잔치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보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본 것입니다.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자기의로는 실패한 자들, 그 율법주의자, 실패자들에게도 루저로 취급받고 멸시받던 자들에게 주어진 예복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 죄인들을 위한 것이요, 나의 죄가 그 희생으로 인해 죄값이 치러지고 온전히 해결되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희생과 사랑의 방법으로 자격 없는 자들을 구원으로 불러모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이 값없는 은혜, 너무 비싸서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은혜를, 단지 공짜로 얻었다고 해서 하찮게 여기고 입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옷도 충분히 깨끗하고 개성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예수님을 믿노라 착각한 명목상의 신자, 사실상은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 존전에 서려 하는 불신자라 생각됩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택함을 받은 자여야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고, 그 택함 받은 자는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청함을 받은 자는 이스라엘입니다. 아니, 그들로 대표되는, 종교성은 있으나 그 열심과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고 거역하는 모든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잘못 판단하시고 잘못된 초청을 하셔서 첫 초청이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은혜를 예비하시고 에덴 그 범죄의 현장에서부터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이기에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해 율법을 먼저 주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인됨, 하나님 존전에 설 수 없는 전적인 무능함을 깨닫도록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이삭, 므낫세와 에브라임 등, 장자와 차자의 역전을 모티브로 율법을 붙들고 씨름하는 자들이 은혜의 복음을 더 늦게 받아들일 것을, 그리하여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 자 먼저 되는 대반적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인간적인 열심의 국면에서 실패를 맛보고 거듭 좌절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실패자, 루저, 죄인으로 낮아진 자들만이 두 번째 초청의 대상이 되어, 우르르르 냄새나고 더러운 죄인들이 천국을 침노하여, 그 영광스러운 잔치 자리에 신랑의 신부로 참여한다는 말도 안 되는 듯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시대에조차도, 예복을 입지 않은 자, 여전히 자신의 추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교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 진리가 이렇게 편만하게 만천하게 공개되어 회자되는데, 심지어 자신도 믿는다 여기고 알고 있다 여기는데도 결코 복음 진리를 알지도, 그 진리에 복종하지도 않는 무늬만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 역시 옛 이스라엘, 자기의를 내세우는 자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비유의 결론으로 '택함을 입은 자'를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인생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율법의 기준 앞에서 철저히 낮아지고 깨어지는 인생 되게 하신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인데 부르신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나를 위한 십자가로, 대속의 십자가로 깨닫도록 도와주신 자들, 깨끗하고 빛나는 의의 옷을 입혀 주신 자들, 그들이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지 않으신다면, 그 참혹한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자신을 구한 대속의 십자가로 믿을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첫번 청함을 받은 자들은 다수였는데도 다 실패했고, 두 번째 청함 받은 자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서 잔치에 다 감사함으로 참여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첫번째도 두 번째도, 두루 두루 많이 청하셨는데, 정작 잔치에 참예하고 그 기쁨에 동참하고 은혜를 누린 자들은 적다고 하시고 그들을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 칭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자이십니다. (여호수아, 호세아의 이름)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습니다. (요나의 고백) 

이 작은 자를 택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 예수님을 구주로 허락하신 하나님, 완전한 100점이신 예수님의 의를 저에게 예복으로 주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고 혼인잔치에 참예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제가 일생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한 자, 온유한 자, 긍휼과 용서가 있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제게 붙여주시는 예복 입지 않은 자에게 제가 받은 은혜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