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지만 하나님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고 불순종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재물을 좋아하고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는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뼛속 깊이 들어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들에 대해 강하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말씀해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고 생각하기도 싫은, 거지를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십니다. 거지야말로, "그에게서 무엇이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만한 인물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천국에 입성하는 좋은 쪽으로 등장시키십니다.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한 동네에 부자와 거지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위호식하고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자색 옷은 그 옛날 왕과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호화로운 옷이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로 거지는 하루 하루 빌어먹고 사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몸도 성치 못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으려 괴롭혔습니다. 그는 부자의 대문에 누워 상에서 떨어지는 것, 그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 연명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로서,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비유인데 이름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의도가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요,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니, 이게 무슨 뜻밖의 전개인가요? 거지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니요!!!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묻은 한 방울 물을 위해 간청해야 하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부자처럼 사는 게 인생들의 로망이고 환상인데, 아무리 비유라지만, 이는 듣는 이들 모두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간절한 부자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어서 왕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살아 생전 좋은 것을 다 누렸고 부자는 고난을 받았으니 사후 세계에서는 처지가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나라에서 위로와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부자 되기를 포기하고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16: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 다섯 형제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증거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으니, 죽었던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그런 기적을 본다면 듣고 회개할 것이라 했습니다.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생각이 착각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모세와 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아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기적은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핵심 내용은 첫째, 보이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니요 내세가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며, 영원한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느냐, 형벌을 받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달리 거지 나사로와 같이 비천한 자가 구원에 들어가고 부자는 지옥에 가는 양상이 많이 펼쳐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 건강, 명예, 안녕을 일부러 다 멀리하고 고행을 하고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전인격적으로 존재 자체가 거지 나사로와 같은 가난한 자, 낮아진 자가 되어야 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괴로움을 받는 자들이 천국에서 위로와 평강을 누린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는 파격적인 선언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비유들을 통해 계속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즉, 호위호식하며 이 땅에서 번영과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인생들의 생각에 계속해서 도전하셨습니다. 그 빌드업 끝에 마치 오오오~~~ 이건 도저히 내가 원하는 것과 타협점이 없구나!!! 하는 '거지'라를 비천한 존재까지 등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도, 산술적인 계산으로 보면 이해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99마리를 놓아두고 1마리를 찾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열 드라크마 중 하나 잃었다 찾았다고 해서 잔치를 벌이는 것도, 배보다 배꼽이 커 보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는 둘째가 재산을 탕진할 것을 짐작했겠지만 그의 뜻대로 재산을 분할해 줍니다. 그리고 다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며 기뻐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경제적 손실을 따진다면 우리는 아마 큰아들과 같이 분을 내며 둘째를 미워하고 그렇게 허용하신 아버지를 원망할 것입니다.
16장,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 해고 통보를 받은 후에도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주인에게 더욱 손해를 입힌 종에 대해, 자기 살 길 찾아 지혜롭게 잘 했다고 칭찬을 합니다. 자기 재산상의 손해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모든 비유들에 흐르는 한 가지 정신은 하나님 아버지는 그 어떤 손해나 손실보다, 잃어버린 그 영혼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는 점입니다. 그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 얻는 것만을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관과 너무다 다른 관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재물을 사랑하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천년이 지난 신약의 성도들 역시 재물을 더 사랑하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사랑하므로, 예수님은 열심히 그릇된 가치관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영혼이 물질보다 귀하다는 것, 영원한 나라가 안개처럼 잠시 살다 갈 이 나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십니다.
주님, 저의 가치관이 지극히 세속적인 것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뭇 버겁고, 아멘으로 화답하기가 어려워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게 됨을 느낍니다. 그 동안 듣고 배운 말씀들,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들이 참 많은데도, 저의 마음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멀고 멉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부자가 되고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며 육신의 안일함과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 사람 앞에서 행동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마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의 눈, 영적인 가치관을 갖게 도와주십시오. 시간이나 돈과 에너지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주판을 두드리며 손해의식을 느끼거나 생색내는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허락해주신 모든 것들로 영혼을 얻고 친구를 사귀고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저의 힘과 지혜로는 되지 않사오니,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성령께서 저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십시오. 기적을 찾고 요행을 바라기보다, 기록된 말씀, 너무나도 반복적으로 열심으로 가르쳐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순종하게 도와주십시오. 아는 것과 삶, 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심히 부패한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입을 다물고 살아내는 데에 힘을 기울이게 도와주시고, 사람 앞에서 시늉만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도와주십시오.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게 도와주십시오. 저를 모든 연약함과 어그러진 것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나의 주님,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며 반드시 이루실 주님, 영원의 세계 속에서 이미 이루신 주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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