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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천국한잔::사복음서

[사복음서] 191.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눅 18:9~14)

by songofkorea 2024. 6. 14.

예수님은 은혜의 복음이라는 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자기의에 계속해서 도전하십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대조적인 두 사람의 기도를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고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감옥의 수감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해 봐도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그래도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인생들의 자기 이해는 이렇듯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끝내지 말고 제 자신이,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 종교사회에서 대단한 명망과 존경의 타이틀입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매국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앞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심으로 물질적이고 재물을 숭상하는 인생들의 마음에 도전하셨다면, 예수님은 이제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사람의 기준, 이 땅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 말씀해 주십니다.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감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죄인들과 같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잘 하는 데 대한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고 감사하는 것이 이렇지 않습니까? 돌아온 탕자처럼 술 담배, 마약, 도박, 음란에 빠지지 않고 착실히 공부하여 좋은 직장 들어가고 교회에서 권사 장로 직분까지 올라가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반면, 세리는 어떻습니까? 그는 어울리지 않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드릴 수 있는 기도란, 회개와 탄식 뿐입니다. 그는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했습니다. 하늘을 쳐다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조아리며 가슴을 칠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 노릇을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면, 당장 그만 두고 돌이켜야 할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럴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더욱 한탄스럽고 자신이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누가 봐도, 좋은 점수를 쳐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후자가 전자보다, 즉,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전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익히 들어온 비유이기에 여상히 받아들이지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말씀으로 들렸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BC 722년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이어서 BC 586년 남유다마저 멸망한 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데도 보호하심을 받지 못한 이유가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고 통렬한 반성과 변화를 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속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뜻을 붙좇는 인생을 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들이 평생토록 율법을 마음에 새기며 죄 짓지 않기 위해 얼마나 투쟁했으며,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요? 그런데 부작용이 있었으니, 그런 만큼 자기의로 똘똘 뭉쳐져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죄인들은 멸시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그들을 도전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바리새인의 기도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서 나라가 망하고 그 무수한 고난과 치욕을 겪었는데, 당연히 율법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율법 준수를 장려하고 죄 짓는 것을 경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기적이고 몰염치한 세리와 같은 자들, 풍기 문란을 조장하는 창기와 같은 자들을 경멸하고 사회적인 제제라로 가해야 맞는 것 아닌가요? 

일리는 있지만 삼사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기에 애쓴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 거룩한 종교성을 발휘하는 중에도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인지, 사람의 인정을 못 받아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한 마음인지 가려내십니다. 그만큼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원하시면, 우리를 그렇기 순수하게, 절대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얻을 것이요, 이 땅의 부귀영화와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자들은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눅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 나무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 공의, 사람에 대한 긍휼의 열매가 맺히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열매는 병들고 굶주린 영혼, 악령에 사로잡혀 시달리는 영혼들, 진리에 목마른 영혼들에게 자기 방식대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실 때에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있지도 않은 율법 조항, 자신들이 만든 전통과 의식을 들이대며 죄인 취급하고 멸시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열매가 이렇듯 교만과 비인간적인 잔인함이었기에, 그들이 자랑하던 이름 '바리새인'은 경건하게 구별된 자들에서 '위선자',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가인은 자기 제사가 당연히 열납될 만한 것이라 여겼고 뜻밖의 결과에 울그락 불그락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나아가는 자만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벨은 아직 율법화되지는 않았으나, 어린양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제사를 대표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이었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면이 있음을 아시기에, 미움과 원망과 오해를 불사하시고 이 정도로 직격탄을 날리며 씨름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자신의 전 존재를 내려놓지 않으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이를 부득 부득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자부심, 자긍심을 내려놓고 복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잠시 유대인들의 눈을 감기시고 귀를 멀게 하셔서 진리에 무지한 상태대로 두셨습니다. 율법 없이 무법천지로 살던 이방인이나 선민 이스라엘이나 모두 죄 속에 갇힌 자임을 깨닫고 오직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얻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구원 역사를 베푸시는 데 있어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생각케 됩니다. 마음이 있고 열심이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님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아는 게 많아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생겨도, 그것은 율법이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시작점일 뿐,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지독한 교만과 자기중심성, 존재의 무력함과 부패함을 확인하는 여정이 창창하게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기도 싫고 원치도 않기에, 하나님은 그 성실하심으로 우리 죄인들을 괴롭히시고 평생에 씨름하여 주십니다. 자기 의가 깨어지고 긍휼과 은혜를 기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기까지,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인간의 힘으로 낳는 열매는 사람 앞에서의 위선과 남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교만과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허망함 뿐입니다. 

주님, 뼛속 깊이 바리새인과 같은 저에게 죄의 무게, 죄짐의 크기를 알게 하시고 제가 하나님과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주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구원 얻은 이후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고방식, 습관이 몸에 배여, 알량한 나의 의를 앞세우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못한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말씀하여 주셔도, 그것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요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가인과 같은 마음, 바리새인과 같은 무지한 말을 버리고, 아벨의 믿음의 제사, 세리와 같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가슴을 치며 통회 자복하는 자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