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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천국한잔::구약

02.13. 유다의 자손에서

by songofkorea 2016. 2. 13.

창세기 37~50장까지는 주로 요셉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38장에는 살짝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동생인 요셉을 죽여 뭐하겠느냐,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자 하고 제안한 그 인물이지요.  


유다는 자기 형제들 있는 곳을 떠나 독자적인 행동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본을 따르지 않고 가나안 여자를 택하여 동거하였습니다. 그는 세 아들을 낳았고 첫째 아들을 다말이라는 여자와 결혼 시켰습니다. 그러나 장자 엘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자식 없이 요절하였습니다. 당시는 계대 결혼이라 하여, 이런 경우 그 아우가 과부된 형수를 거두어 주고, 첫 아들을 낳으면 죽은 형의 계보를 잇게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형수와 동침하되 형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아들을 낳아주기 싫어했습니다. 이 악행으로 하나님께서 치셔서 둘째 역시 요절하였습니다. 


아버지된 자로서 아들을 둘이나 잃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아들 다 잡아먹겠다 싶어 수를 썼습니다. 셋째는 아직 어리니, 친정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 셋째가 장성하면 부르리라 하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자 며느리 다말은 더 기가 막히는 이상한 수를 썼습니다. 


유다의 아내가 죽은 이후, 유다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부의 의복을 벗고 얼굴을 가리고 창녀 행색으로 유다를 기다린 것입니다. 유다는 까맣게 모르고 며느리와 관계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염소 새끼를 약속하고, 갖다 주기까지 다말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신분증으로 맡기고 왔습니다. 그러나 염소를 데리고 다시 찾아갔을 때, 그 창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산 지 아홉달 반, 유다의 귀에 수절 중인 며느리가 어서 애를 배어왔다는 망측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유다 자신도 행실이 나빴으면서, '그건 그거고.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러나 내 며느리가 행음을 해? 그건 못 참지' 하며 다말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뻔뻔하게 호령하였습니다. 이 때 다말은 끌려나가며 비장의 무기를 꺼내었습니다. "이 아이디카드의 주인이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게 누구것이지요?" 


유다는 뒤통수를 맞은 듯 망연자실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8:26)" 


죄가 만천하게 드러나도 '모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하며 오리발을 내밀고, 힘과 권력을 동원하여 빠져나가고 무마시키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세태를 볼 때, 한량같은 유다이지만 이 점은 참 훌륭한 것 같습니다. 그는 두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고, 인생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기며 많이 성숙해지고 다듬어집니다. 그리고, 이후로 동생을 노예로 팔아치운 일과 관련하여서도, 열 형제들의 해묵은 죄과를 청산하고 요셉과 관계성이 회복되는 일이 중차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임신하였고, 이 부끄럽고 민망하기 그지 없는 혈통에서, 약속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례적으로 등장하는 여섯 여인 중 다말의 이름이 떡 허니 올라 있습니다. 이는 가감 없는 역사의 기록으로서의 성경의 정확성을 입증해줍니다. 족보를 중시하던 우리나라 선조들은 유다와 다말 사건 때문에 성경을 무시하기도 하고, 또 성경의 정직함에 놀라 진지하게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다와 다말 사건의 행간에는 적나라한 인간의 허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와 성장과 성숙을 이루고 정직하게 회개하는 자들을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더 나아가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여 주시는 은혜가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