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맥락이 무엇입니까?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한다며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에 빠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쳐 주십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한 닢에 이어,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타산, 더 나아가 해묵은 신념과 하나님 역사에 대한 오해까지 내려놓고, 인간 본연의 감정과 상식으로 본질을 생각해보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로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객관적으로 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보도록 도와주십니다.
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이야기 속의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는 버젓이 살아계신 아버지께 유산을 미리 땡겨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화를 내고 호되게 훈련을 시킬만도 한데,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각각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작은아들을 며칠 내로 서둘러 재산을 다 정리하여 현금성 자산으로 바꾸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사는 것이 지루하고 갑갑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하고싶은 대로 마음껏 놀며 즐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쓰는 것은 쉬웠습니다. 허랑방탕하게 사치 향락을 즐기다보니 금새 재산이 바닥난 것입니다.
15:14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공교롭게도, 돈이 똑 떨어진 때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고... 다들 힘드니 이 작은아들에게 돌아올 긍휼이란 없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으로, 옴짝 달싹하지 못할 상황으로 빠진 것입니다.
탕자는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조차 절박한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나라에서조차도 천한 일, 돼지를 치는 일을 얻게 되었습니다. 돼지고기는 율법이 금하는 부정한 음식이요, 식용으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없을 일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버렸기에 생겨난 가장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탕자가 당하는 비참함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는 비로소 지금의 형편이 자신이 아버지 집을 떠난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만 해도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마음 좋은 주인을 모시고 자기 할 일을 하고 평안히 사는 품꾼들을 생각하니, 그 아버지께 감사함을 모르고 아들로서 누리는 축복들을 하찮게 여기고 박차고 나온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철 없었는가, 뼈저리게 후회되었습니다.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작은아들은 더 이상 돼지 오물 위에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고향, 아버지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훌륭한 점이 무엇입니까? 자기 잘못을 깨끗이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더라도 자식의 마음을 얻고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싶은 아버지였으니까요!!!
놀랍게도 아직 저 멀리 있는데도, 거지꼴을 한 초라한 모습인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담박에 알아보았습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체면 불사, 나이 불사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의 목을 안고 기쁨과 감격으로 엉엉 울었습니다. 아들의 얼굴과 온 몸에 뽀뽀 세례를 퍼부으며 반겨주었습니다.
아들은 자기 과오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노라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거듭 자신이 아들 자격도 없다, 그저 일꾼들 중 하나처럼만 대우해주어도 감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헐벗은 발에 신을 신기게 하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은 줄로만 알고 슬퍼했던 아들, 영영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아들이 뜻밖에 살아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집 나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램프 속 지니 요정, 돈 뜯어내는 자판기 정도로 여기던 아들이, 마음이 변하여 양심 있는 소리를 하고, 아버지께 사죄하고, 작은 은혜도 감사하려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아버지가 바라던 사람다운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 뭔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성숙한 아들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런데 맏아들의 반응은 전혀 아버지 마음과 달랐습니다. 그는 풍류와 춤 추는 즐거운 소리가 동생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었습니다. 잔치 자리를 보기도 싫어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며 분을 내는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큰아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었습니다. 나와서 함께 기쁨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다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비로소 큰아들의 속내가 드러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살림을 창기와 말아먹은 둘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시면서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잔치해주신 적이 없었다고 원망했습니다. 자신은 둘째와 달리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고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너무 불공평하다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비유의 초반에,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모두에게 각각 유산을 내주었다고 나옵니다. 큰아들은 받은 것이 이미 많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얼마든지 자기 산업을 꾸리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러 해 아버지만 섬겼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마음은 작은아들보다 더 지옥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동생에 대한 분노, 지나간 세월에 대한 자기 연민이 가득 차 있습니다. 놀랍게도, 마음의 거리로 치자면, 그는 결과적으로 동생보다도 멀리 멀리 동떨어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자기 의와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었습니다.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동생에 대해 '죽었다가 살아난 자', '잃었다가 얻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식이 죽고, 자식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아들이 살아돌아왔을 때, 다시 찾았을 떄,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쁠까요. 큰아들이 모르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수고를 셈하고 보상을 셈하고 재산의 이익과 손실을 셈하는 것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껑충 뛰어넘고 초월할 만큼, 한 영혼의 소중함, 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모두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탕자들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솔직하게 본성대로 살다가 이리 저리 깨어지고 방황하고 겪어가며 자신을 발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반면, 큰아들은 작은아들의 어리석은 방종을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당위와 도덕과 효성과 책임감과 신앙심, 체면 등등, 어떤 이유에서건 아버지 집에 머물러 충성 봉사하며 무미건조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결국, 큰아들도 집 안에 있는 탕자, 착각 속에 사는 더 심각한 탕자, 마음 통하기가 더 어려운 중증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자기 열심을 내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인색한 아버지, 해주는 것 없이 충성과 섬김과 희생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비유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무엇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니십니다. 생명도 주시고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고 원하는 것도 주시고, 심지어 배은망덕한 악행도 회개하고 돌아오자 기꺼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리고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아는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드리는 것,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둘째가 방황을 통해 이 숙제를 더 빨리 마치고, 합격을 먼저 받은 셈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일찍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탕자는 잘못된 판단과 과오와 죄악된 결정들, 그 결과 맞은 결핍과 실패와 비참함을 통해 비로소 이미 가졌던 것들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그 축복을 누리고 감사할 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실패의 과정 없이 잘 살 수는 없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잃어보지 않고, 결핍이 없이도, 누릴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행복했다면 좋겠지만, 둘째 아들의 됨됨이로는 그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탕진할 것을 뻔히 알고도 둘째가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했을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아들 걱정으로 잠못 이루는 고난의 터널을 지날 것을 각오하고 그를 보내주었을 것입니다. 왜냐, 마음을 얻기 위해서죠. 둘째가 깨져보고 잃어보고서라도 돌이킬 것을 기대한 것이죠. 비참한 상황이 되고서야, 거역하고 헤매고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인생들의 됨됨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에 선악과를 심어놓으시고, 배반과 거역을 허용하셨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필수적인 코스였을지도 모릅니다. 실낙원한 인생들은 둘째처럼 먹고살기 위해 땀을 흘리고, 부당하고 착취하는 못된 이방 왕들 밑에서 착취당하며 고통하다가 겨우 겨우 창조주 하나님, 좋으신 하늘 아버지를 기억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영접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비유의 아버지보다도 더한 희생을 치르십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 성자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이킨 인생들은 모두 둘째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을 좇아 하나님 주신 인생을 낭비하고 비참한 자리에 주저앉게 되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 용서하심, 용납하심을 기대하고 나아온 자들입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런 좋으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긍휼과 자비의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하신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둘째 아들처럼, 죄인인 저를 받아주신 하나님 은혜를 깊이 감사하고 늘 겸손한 자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집에 거하며 충성하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자기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연약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천국 곳간에 신약과 구약을 가득 저장하고, 필요한 영혼들에게 마음껏 내어줄 수 있는 주님의 종 되게 도와주십시오. 이 땅에 복음의 깃발이 선명하게 나부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사, 둘째와 첫째들이, 십자가 아래,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부어지는 자리에 몰려들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아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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