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초인간적인 기사와 표적들이 나타나자, 예수님을 뒤따르며 제자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의 스타들보다, 아이돌보다, 예수님은 더 인기가 좋으셨을 것입니다. 예술성있고 재능있고 멋지고 아름답고 귀엽고 춤을 기깔나게 잘 추고 인간미도 있고 그렇다면 그 연예인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무려, 평생 고통하던 질병, 불치병, 악한 영에게서 건져주고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천국에 대해, 구원과 영생에 대해 진리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이 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마음에 찬물을 촤아아악 뿌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아무든지, 그 누구라도... 이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릇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긍정하기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옳다 여기는 그 기준에 부합하면 떳떳하고 자긍심이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러한 본성적 욕구와 정 반대입니다. 나를 긍정하는 마음, 나의 옳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과 사랑을 얻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와 반대입니다. 부정당하고 거절당하고 옳지 않음, 못난 모습이 드러나고 자존심이 뭉개지고 낮아질 때, 사람은 엄청난 괴로움을 느낍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본성이 원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 자신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건 사고를 만나고 상황을 접하고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한계를 맞닥뜨립니다. 자신이 옳지 않음을,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갈대임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서로 서로 속고 속아주며, 나도 그럭저럭 괜찮고, 너도 괜찮고, 모두 다 한계적인 인간이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데 만족하며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터지고 폭발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욕심내는 사람에게는 한계와 약함을 인정하기 어려워 계속 요구하고 종용합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인정하고 용납하기가 어려운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언제까지요? 더 이상의 노력과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알 때까지 말입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복음을 통해,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때입니다.
그런 자들이 자기 원하는 것, 자기 욕망, 자기 중심성, 이기심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크고 아름다우신 하나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된 것을 알고,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못난 자신을 그러쥐고 집착했다 미워했다 생 난리를 치던 데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너무 너무,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기 원하기에, 본성적인 이기심을 이기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사형틀, 십자가를 가져가 대신 져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발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먼저 구원을 얻은 자들로서 그들은 자신 주변에 있는 영적으로 무지몽매한 자들을 살리는 것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잘 압니다. 불신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얻도록 돕는 방법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실천하는 것임을 압니다. 아, 이 얼마나, 말은 쉽고 진리이나, 연약한 저를 알기에 두렵고 떨리는 말인지요. 연약한 인생들로서는 은혜만 누리고 십자가는 멀리하고 싶지만, 마음 깊이 이 십자가의 길이 능력임을 압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죄와 비진리 가운데 헤매이는 영혼의 고통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자의 누릴 자유와 기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한계가 많고 자기 죄와 싸우기도 버겁지만, 꾸역 꾸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울며 기도하며,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그 은덕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그 극한 고통에서 놓여나고 믿음을 선물로 받고 소망과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자가, 또 어떻게 타인들의 고통과 영원한 심판의 운명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막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교회 성도들이 흔히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합니다. 한 영혼의 귀중함을 강조하는 뜻은 좋으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왜곡된 표현이 굳어지고 널리 퍼진 것입니다. 천하에 현존 인구만 해도 70억명이 넘고 엄청나게 많은 영혼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고 하면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저, 한 사람에게 그 목숨과 천하의 경중을 재면 자기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하보다 귀한 내 생명'이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여하간, 이 땅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명일 것입니다. 천하의 금은 보화 부귀 영화를 다 얻는다 한들,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막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목숨을 지키는 방법, 잘 유지하는 방법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소중한 목숨을 '구원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다가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잃으면 구원한다고 하십니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하기에 자기 목숨을 잘 지켜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구원이 필요하다고 깨닫더라도,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게 됩니다. 스스로 지킬 수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새 새명을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구원을 주십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 제 목숨을 잃는 자입니다.
우리말의 순서상 마치 조건부인 것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구원 얻으리라 하는 순서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목숨만 붙어 있고 구원이 필요한 자들, 죄로 인해 첫째 사망을 당하고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받을 운명에 처한 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보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자들, 그 영혼이 살아난 자들만이, 이후의 인생 여정에 주와 복음을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고 구원 얻은 자들은 그 처참하고 두려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이루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합니다. 죄악된 세상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원자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도 않고, 원래의 본성을 따라 죄 많고 음란한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께서도 부끄러워하십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위대한 프로젝트의 의미도 모르고 끝내 거절하는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인자가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제자들과 무리들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직후에 있을 변화산 사건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삶의 목적이 어떠한지 그 뚜렷하고 구별된 특징이 나타납니다.
1.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자들,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용서와 사랑과 은총의 복음을 누리는 자들은 세상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보는 세계가 다르고, 셈법이 다르고, 선택이 다르고, 삶이 다르고, 인생의 열매가 다르게 됩니다.
2.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3. 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삽니다.
4. 그들은 여전히 이 죄 많고 음란한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예수님과 예수님 하신 말씀들, 즉, 죄악된 세상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5. 그들은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오실 때에, 그 마음의 동기, 인생의 목적, 삶의 열매가, 모두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행한 것임이 드러나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과 상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주로 허락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제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게으름과 안일, 자기 영광, 자기 긍정, 사람의 인정과 인기를 구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제가 주신 매일 매일의 작고 소박한 이 십자가를 충성되이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죄악되고 부족한 저를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제가 지혜와 힘과 믿음을 주십시오. 물질과 건강을 주십시오. 말씀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세속적인 시각, 타협하고자 하는 제 생각을 섞지 않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주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주님을 세상 그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현존하는 그 어떤 화려하고 멋진 스타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 아름다우신 분, 사랑스러우신 분, 매혹적이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저의 수퍼스타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저의 기쁨, 저의 행복, 저의 자랑, 저의 노래, 저의 깃발, 저의 메시지, 저의 스토리의 주인공이십니다. 더더욱 선명하게,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게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연약한 무릎이 힘을 얻고 일어나 날마다 주와 복음을 위한 십자가의 길 따라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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