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여자와 어린아이들 외에 4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건너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마 16: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두 번이나 무한 발행되는 걸 봐서 이제는 믿음이 생겨서일까요? 제자들은 광주리에 남은 떡 거둔 것을 챙기는 것을 깜빡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하시다니요...
마 16:7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누룩'이란 단어를 듣자 떡을 생각했고, 방금 놓고 온 떡 광주리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떡 안 챙겨온 것을 나무라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니, 이게 웬 문해력이란 말입니까? 이 시점에 누룩 이야기라니... 제자들의 수준을 잘못 아신 예수님께서 잘못하셨네요 하하하
마 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마가복음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막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방금 보고도 예수님이 떡 잊은 것을 문제 삼는다고 생각하다니, 혼나도 싸지요.
마 16: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마 16: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왜 이렇게 둔할까요? 그냥, 예수님께서 뭔가 중요한 걸 가르쳐주시려나보다 하고 여쭤보면 될 텐데 말이죠.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마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그들의 교훈을 가리키심입니다. 누룩은 적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를 크게 부풀이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어떤 악영향을 끼칠까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알고, 말하고,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그렇게 가르치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컫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여기서는 언뜻 행함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말은 쉽고 행함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만 하더라도 생각하기에 연약한 인간이 지키기 너무 어렵겠다 싶으면 자의적으로 편의적으로 덜어내고 축소하는 행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의는 하나님께 불합격이요,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획득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종합해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편의적으로 축소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잘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는 모자란 의입니다. 불합격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 교회의 리더들, 목회자들, 직분자들, 사명자들은 무엇을 유의해야 합니까? 말만 하고 행치 않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가르치고 어렵다 싶으면 덜어내고 비중이 작은 것처럼, 덜 중요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합니다. 어렵고 부담스러우면 있는 그대로 어렵네요, 도와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순종할 수 있을까요,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여쭙고 씨름해야 합니다.
또한 연약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다 행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 어느 한 가지도 온전히 행하기 어려운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더 나은 의를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더 나은 제사, 받으심직한 제사를 드리는 아벨과 같이 믿음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인정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를 내 의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법칙이요, 하나님 존전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율법이 율법의 권위를 지니고 있고, 하나님 말씀을 경외하며 행하고 순종하려 애쓰면 율법은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합니다. 즉, 다 지킬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인정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로마서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아니, 이 시대에도 너무나 다양한 이단 잡설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대로 가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높은 기준은 낮추고, 마음껏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세우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하고 아주 경건하게 들립니다. 단지 믿는다고 구원 받았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다, 나는 예수님 믿으니까 구원받았다 하는 소리를 스스럼 없이, 건방지게 하냐고,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매일 매일, 죽는 그 날까지 말씀을 순종하며 행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가르침만 그렇고 자신들은 행하지 않습니다. 삶의 열매가 그렇습니다. 성경이 가르키는 그 놀라운 요구들처럼 살아내는 사람은... 제가 본 바로는 맨발천사 최춘선 할아버지? 그 정도입니다. 정말 매일 매일 말씀을 순종하며 산다면 그들은 성도들 뿐 아니라 세상도 인정할 만한 엄청난 성자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혹은 언젠가 그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예수님 십자가 아래 무릎 꿇을 수밖에 없겠지요.
율법을 축소하는 것, 행하라 가르치면서 정작 행하지 않는 것, 그것은 가르치는 자들의 최악의 조합입니다.
반면, 행함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힘을 받는 이유도 자명합니다. 입술 신앙, 값싼 복음이라 비판받는 얄팍한 믿음입니다. 단순한 것인지 믿음이 좋은 것인지, 자기에게 좋은 것이라 판단되니까 넙죽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그 단 열매만 취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죄에 대한 방종이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을 강조한답시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 그러나 용감하게 믿으라."
그의 진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자로서, 죄 때문에 너무 짓눌리지 말고 과감하게 행동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더욱 담대히 신뢰하십시오' 이런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반을 생각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음을 믿으며, 그것을 계산에 넣고 '용감하게', '과감하게' 죄악된 행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다룬 것처럼, 정당화될 수 없는 궤변이요 헛소리입니다.
에스겔 20:42~44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고
기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게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자기 죄를 깨달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놀라게 됩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의 예수님의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너무나 죄송스럽고 너무나 감사하여 놀라고 감격하게 됩니다. 자기 죄와 어리석음과 무지를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은 자는 더러워진 양심이 깨끗해지고 하늘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 마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율례가 그 마음에 새겨집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고초와 희생을 당하셨는지 잘 알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엄청난 인내와 사랑으로 구원해내셨는지를 잘 알기에, 죄를 지으면 괴로워하고, 할 수만 있다면 죄를 짖지 않고 싶어합니다. 연약한 자들이 험악한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매일 매일 죄를 짓게 되지만, 그렇기에 매일 회개하고 겸손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믿은 처음 그 시간부터 죽을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삽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For the gospel reveals the righteousness of God that comes by faith from start to finish,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겉으로 보면 도토리 키재기로 믿는 자도 허물이 많고 개인차도 많고 다양한 군상이지만, 마음 중심과 태도가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그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며 회개케 하시고,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참된 신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평안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결코, 용서를 믿는답시고 과감하게, 용감하게,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남에게 그렇게 권면하는 것은 더더욱 못할 짓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 자신이 줄담배를 피우는 것을 숨겼고, 암살당하던 바로 전날도 모텔에서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죄를 계속 즐기고 싶어하는 사라이 목사라는 타이틀을 쓰고 세상에서 큰 업적을 세우고 존경을 받았으나, 그리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의 죄에 대해 얼마든지 이해하고 관용으로 대할 수 있으나, 예수님 십자가 믿고 과감하게 죄를 지으라는 발언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거란 말입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죄는 죄요, 믿음으로 완전한 의를 얻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말씀하신 대로,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으로 힘들어하고, 또 무겁고 버거운 만큼 얼른 십자가 앞에 들고 나아와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쳐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기꺼이 그런 자들에게 복음의 능력, 살리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전하고 흠모하고 널리 널리 공개된 복음이 왜 이토록 어려운 것입니까? 왜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고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된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누구와 경험합니까?
가라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려두었기 때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총동원하여 인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과정 과정 하나님의 오케이! 사인을 구하며 될 때까지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나의 죄를 비추고, 애통한 회개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성령께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 깨끗이 씻김 받고 불로 태워 더러운 것들을 소멸하는 역사, 하늘로부터 새 생명을 받고 새 마음을 받는 역사, 새 피조물이 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 영적인 실제를 간과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이런 혼탁한 상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능력과 권능의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애통하는 죄인의 영혼에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을 가르치고, 그 일이 영혼 가운데 일어나는지 살피고 지혜롭고 섬세하게 돕는 것, 그것이 종교 지도자들이 할 일입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결론은 버킹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적 실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성령을 선물로 주겠노라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고자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심령이 되기 위해서 율법은 율법대로 그 기능을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서 '너 그만하면 되었다. 합격이다. 의롭다! 하시는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양심에 따라,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 안 되고 실패하여 좌절하고 슬퍼하는 무수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제가 죄인이네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설 수 없는 자네요. 어떡하면 좋아요. 제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제발 도와주세요~' 하는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자신이 느낀 것보다도 훨씬 더 가공할 만한 죄의 크기와 무게와 자신의 영혼이 고통하던 그 시커먼 심연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소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와 믿음이 입을 맞추고, 죄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종달새처럼 비상하며, 외양간에서 뛰어나온 송아지처럼 기쁘게,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신자로서의 삶을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로도, 믿음보다는 자꾸 자기 의, 세속적인 욕심, 인정욕심, 정욕, 허영, 거짓, 미움 등... 다듬어지는 과정이 있겠지만...일단은 새 생명을 받고 영적으로 응애!!! 신생아로 태어나는 지점이 있어야 뭘 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 뭘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쩔쩔 매는 교회들, 혼탁한 목소리들, 방황하는 영혼들, 그 틈을 노려 판을 치는 이단들, 멀쩡한 기독교 간판을 내걸고 다른 복음을 획책하는 자들, 그 뒤에 웃고 있는 이리 늑대와 같은 사탄이 느껴져 속이 상하고 입맛이 없습니다. 주님,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 상황도 아시고 허용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고 계심도 믿습니다. 먼저 믿은 자로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제 문제에 매몰되고, 육신의 영달과 안일을 추구했던 불충한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힘과 능으로 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원함도 소용 없고, 하나님께서 제 편이 되어 주시고 힘을 주시고 저를 써 주시기까지, 제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있겠지요? 제 자신이 믿음으로 서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에 순종해야 함을 압니다. 도와주십시오. 알려주시고, 믿음 주시고,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이 땅에, 열방에,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주님,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친히 일하여 주십시오. 이 부족한 자를 사용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누구를 쓰셔도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명히 드러나고, 주님께서 구원 역사, 생명의 역사 이루시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천국에 자리가 모자라지 않잖아요? 긍휼과 자비가 한량이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 정확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 주님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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