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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 복음이 궁금해?

28. 장대 높이 달린 놋뱀

by songofkorea 2017. 1. 12.

큐레이션 : 의료계 심볼의 형상

 

하면 일반적으로 당장 떠오르는 느낌 있지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뱀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 (창세기 3:14,15)”


그래서 그런지, 뱀을 보면 사람들은 보통 비명을 지르고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급차, 의료 기관, 제약 분야의 많은 심볼들이 막대기를 칭칭 감의 뱀의 모양을 담고 있습니다. 귀여운 동물, 생명과 평화를 상징할 만한 것들을 제쳐두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뱀을 택했을까요? 유래가 무엇일까요


        


조성욱님 페북에서 가져온 동영상입니다. 

 

오늘의 말씀

민수기 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요한복음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Q1. 민수기 214~9절을 읽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을 만났습니까?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Q2. 그들은 어떤 벌을 받았습니까?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Q3. 장대 위의 놋뱀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복음 3, 니고데모와의 대화 참조)


핵심 짚어보기

이 땅에 사는 동안 만날 수 있는 가장 귀한 보물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면, 성경 구석구석에 콕콕 박아넣으신 복음의 메시지를 보물찾기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입하시고 인생들과 대화하시는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안에 두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알게 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현장에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것으로 시작하여,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손아귀를 벗어나 탈출한 것,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임재하시기 위한 성막 제도, 하늘에서 매일 내려주시던 만나, 반석을 쳐서 나온 물, 죄 없는 짐승을 대신 희생시키는 제사 제도나 성막과 성전, 지난 시간 살펴 본 아사셀의 염소 등,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가리키는 상징과 예표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마음놓고 믿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예표와 사인들로 반복 학습을 시켜주시는 것이죠.

 

오늘 배울 민수기 말씀에는 놋뱀이 등장합니다. 때는 BC 1406년 경, 40년 광야 훈련 막바지 시기.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고 일상 생활 속에 누렸습니다. 매일 성실하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옷이 헤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중동의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주고 밤이면 불기둥이 와서 온기를 주고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오합지졸 히브리 민족의 전투력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 증조 할아버지부터 아들 손자까지 대대로 노예 생활을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코드가 맞기까지 성숙되기에는 너무나 요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바로 하나님께 대해,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 대해 불평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이집트엔 매장지가 모자라 이 광야까지 끌고 와서 죽이려느냐, 이집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 거기선 고기에 파, 마늘도 먹었었다 하며 독한 말들로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그 날도, 방금 전까지도 선제공격 해오는 가나안 남방의 아랏 왕의 군대를 대파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터였으나야곱의 형, 에서의 족속이 사는 에돔 땅을 둘러 가느라 험한 광야 길을 걷자니 발이 아프고 목이 마르고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의 그 나쁜 습관이 바로 튀어 나와 독한 말들로 불평 불만을 쏟았습니다.

그 동안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관용과 아량으로 이들을 참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사막의 맹독성 뱀들을 떼거지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 뱀은 물리면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끼다가 죽는다고 하여 불뱀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독사들이 우글우글 몰려와 마구 물어대자 이스라엘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비명과, 고함, 쓰러져 가는 사람들과 울부짖음

 

보라! 보면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급히 모세에게 와서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민수기 21:7)”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 씨름하시니 가랑비에 옷 젖듯, 콩나물 자라듯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급해서 그러긴 했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시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받는 징계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이 해결책임을 안 것입니다.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셨으므로, 하나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수기 21:8)"

 

백성들이 기대하고 요청한 것은 독사들이 떠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독사에 이미 물린 사람들은 포기하고 앞으로라도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대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특이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뱀의 형상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물린 자들마저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뱀이라니뱀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첫 조상 아담과 하와를 도탄에 빠뜨린 거짓말장이, 인류의 원수, 죄의 상징 아닌가? 응징의 대상 아닌가? 모세는 적잖이 의아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시각각 죽어가는 백성들 앞에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는 노릇,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지시겠지그는 얼른 놋을 쳐서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청껏 외쳤습니다.

뱀에 물린 자들은 당장 고개를 들라. 어서 장대 높이 달린 놋뱀을 보라. 보는 자는 살아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민수기 21:9b)”


 

놋뱀, Gustave Dore (KCM), 느보산의 놋뱀상 (http://m.blog.daum.net/augustine76/12237357)

 

뱀은 성경 전반에 걸쳐 죄와 그에 대한 형벌, 저주를 상징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입장에서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장대 높이 달린 이 뱀은 왜살리는뱀이 되었을까요모세 때의 그 사건이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놋뱀을 아끼다가 급기야 우상처럼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히스기야 왕은 영적인 개혁을 위해 이 놋뱀 형상을 부수어야 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데 자꾸 손가락 끝만 주목하면 안 되는 법

 

예수님과 놋뱀

요한복음 3,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높이 매어단 놋뱀에 자신을 비유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3:14)”


여기서들린다는 것은 무슨 공중부양처럼 신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 나무에 매어달리는 처형 방식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의 신명기 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아 죽인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진짜 진짜 극악무도한 죄인, 땅도 용납할 수 없어 토해내고, 공중에 매어달려 아무 가릴 것도 없고 피할 방도도 없이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과 저주를 받아내야 할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죄임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21:22,23)”

 

신적인 능력과 기적들, 죄인들과 낮은 자들을 영접하고 위로하시는 모습, 기존과 전혀 다른 말씀과 영적인 권위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신 예수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라 기대하며 따랐기에,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굳이 민족적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로마와 시저 황제에게 아부하며 십자가형을 청구한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대 높이 매어단 놋뱀은 최악의 조합입니다. 그런 기괴한 방법으로 독사에 물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하시면서도 자신을 그 놋뱀에 비교하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뱀처럼 나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죄 덩어리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 (이미지 출처 : http://blog.daum.net/css1227/173)


예수님은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고통이나 수치, 죽음 따위는 가까이 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아들로, 우리와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그 위엄과 권위와 기적의 능력들은 다 어디 가고, 십자가 위에 피투성이 벌레처럼 되어 매어달려 계셨습니다. 너무 끔찍하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으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 눈에 사랑하는 독생자가 아니셨습니다. 죄의 원흉이요, 온 인류의 죄짐을 송두리째 뭉쳐진 죄 덩어리 취급 당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 되셔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의 얼굴을 보고 철저히 외면을 당하시던 자리이는 예수님께 채찍과 십자가 형이 주는 육체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무 높이 달려 속절없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계신 것일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를 수없이 쌓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인생들 대신 형벌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고, 노예처럼 비참하게 매인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시고, 심판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기시기 위함입니다.

 

놋뱀을 보고 살아나는 것,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거듭나는 것

독사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 장대 높이 매달린 놋뱀 형상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었을까요. 바로 직전까지 죽을 것처럼 고통하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다가 살아났을 때, 그 감격과 안도와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된 이후를 살아가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현상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바로 거듭남이라는 영적 실제로 나타납니다. 육체로 한번 태어났지만, 또 다른 탄생,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는 두 번째 탄생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이스라엘의 최고 엘리트, 사회적 명성도, 신앙적인 수준도 높았으며, 대다수의 기득권층과 달리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인정할 줄 아는 정직한 눈을 가졌던 니고데모그러나 성경에 박식하고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놀라운 민수기 사건, 광야의 놋뱀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콕 집어서 얘기해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4~16)”

 

인간은 죄와, 세상의 무서운 현실과,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눌린 자들입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고 건강한 몸을 움직이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실상은 독사에 물려 온 몸에 독이 퍼져가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게 한 칠팔십년 걸리고, 그 여정에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살며, 남들과 비교하여 좀 괜찮은 생 아니었나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종국에는 독이 다 퍼져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 놀라운 굿 뉴스가 있으니, 하나님은 죄 값을 치르고 죽어야 할 우리에게, 심판 대신 용서와 구원을 작정하고 준비하셨습니다. 그것도, 독이 퍼져 죽어가는 모든 자들, 그 누구라도 통하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구원 말이지요.

 

민수기 사건에서,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된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고개를 들어 장대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나무 높이 달리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상을 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죄성과 서로 주고받은 독한 상처로 고통하는 영혼들, 생명되신 하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어 진실을 볼 수도 없고, 치명적인 죽음의 병을 치료해낼 수도 없는 영혼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딱 거기까지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입니다.

 

놋뱀을 바라볼 때 신기한 구원의 능력으로 치료해주신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거듭남을 이루어 주십니다. 나 자신이 바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임을 깨닫게 하시고, 나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이 벌을 받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나의 구원자,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장대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자는 살리라약속하시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한 자들을 모두 살려주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소중한 희생으로 보증하신 언약을 지키셔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거듭남을 허락하십니다. 죄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하늘나라를 맛보게 하십니다.

 

거듭남이라는 신비를 알게 하는 또 다른 힌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고개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이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 영혼에 울려 퍼집니다. 그 때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25)”

 

어릴 때에는 이 세상이 나의 무대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실력을 쌓고 업적을 이루고 나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현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 여겼습니다. 생의 달콤하고 가치 있는 고갱이만을 맛보고 싶고, 할 일 많은 세상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고 싶고그런 막연하고 부왕부왕한 희망을 품은 채 멈추지 않고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이 세상은 결코 핑크빛 세상이 아니요, 나의 욕망의 대상은 그저 신기루임을 거듭 확인하게 되더군요.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이해하기 어려운 부조리함들, 그 거대한 세상의 벽 앞에, 별반 다를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보이는 초라한 나 자신그쯤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 넘어 더큰 산,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합격점을 받을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절망하게 되었지요. 저는 거짓과 교만과 정욕과 허무의 독화살에 맞아 서서히 죽어가던 영혼이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몸부림치다가, 하나님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는 미미하고 비참한 존재로 끝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흘러 흘러 저에게까지 들려왔습니다. 죄짐과 인생의 짐과 종교의 짐에 깔려 죽을 듯이 고통할 때, 하나님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마태복음 11 28절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저의 영혼을 강타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서, 제 자신이 하나님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비참한 죄인임을,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저를 살리시기 위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 복음을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놀라우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에 제가 열심히 복음을 예표하는 말씀들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부족한 제 글에 담기 너무나 황송한 이 말씀들이, 독이 퍼져가는 몸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선 당신에게, 어느 순간 단순한 까만 활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 당신의 온 영혼을 울려 깨워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멘!

 

팡세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하여 당신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 예수님은 지금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