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 우리 같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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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들리니>라는 드라마에서 미숙(김여진 분)은 사고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수화로 ‘같이’를 말합니다. 봉영규(정보석 분)도 ‘우리 같이 있어요’를 애타게 외칩니다. 그러나 결국 이별을 하고야 마는 이들 가족… 봉영규와 봉우리(김새롬 분)는 미숙을 떠나보내며 하늘을 향해 다시 한번 온 몸으로 ‘같이 있을게요’를 외칩니다. 사랑하는 이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그리고 함께 할 수 없을 때 오는 그리움, 그리고 그것이 기약 없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느끼는 아픔은 어찌 보면 행복한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할 이가 없는 외로움이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느라 느끼는 고통과는 다르니까요.
좋아할 수 없는 사람,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과 가까이 있어야 할 때의 괴로움은 또 어떨까요.
저보다 한참 어린 후배 하나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정말 어른스럽고 속이 깊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칭찬을 해주었더니, 어린 시절부터 반장을 하고 늘 칭찬을 들어온 그는 때론 그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선생님들이 반에서 소외되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아(?)들을 이 친구 짝꿍으로 지정을 하곤 했답니다. 이 착한 후배는 그 의도를 알고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 순종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도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그런 친구들이랑 앉고 싶은데 참아야 했으니까요. 그 어린 나이에, 마음이 맞는 친구랑 재미있게 학교 생활하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성격이 모나거나 주위를 힘들게 하는 아이와 짝이 되어 묵묵히 감내해냈을 후배를 생각하니, 참 경이롭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내가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누가 있나요? 나는 누군가에게,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존재일까요? 더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어떠할까요? 오늘은 이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오늘의 말씀
출애굽기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Q1. 출애굽기 25장을 읽어보세요. 성막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요? 성막을 이루는 각 요소와 제사장이 집전하는 제사 의식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Q2. 히브리서 9장을 읽어보세요. 첫 언약, 즉,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이후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막(성소)와 예수님은 어떻게 비교, 대조됩니까?
Q3. 성막, 성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임마누엘의 방식과 그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핵심 짚어보기
하나님과 인간의 딜레마
시내산 언약을 무참히 깨뜨린 이스라엘,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감, 이제 조건부 언약, 상호간에 책임질 의무가 있던 첫번째 언약은 이스라엘의 과실로 폐기될 상황에 처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마음이 상하셔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가지 않겠노라 선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가까이 하면 이 못되먹은 자들에게 돌격하여 칠까봐 두렵다고까지 말씀하셨니다.
하나님은 친히 구원해 내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친구처럼 대하시던 모세에게조차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33:20). 인간의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가까이 가면 즉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함께 함의 문제에 있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얼룩진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 그렇다고 쿨하게 굿바이하지도 못하고, 그리움과 연민으로 애가 타시는 하나님의 딜레마, 이 딜레마를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 (God with us,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 성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저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대신 죽임 당할 희생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정의를 이루어야 할 거룩하심은 예수님을 심판함으로써 만족되고, 사랑하는 인생들은 죄로부터 분리시키시고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덕분에 하나님은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아주실 수 있고, 우리 또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성막 : 구약의 임마누엘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애굽기 25:8,9)”
시내산 정상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성막의 설계도를 말씀하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모세는 얼른 텐트 하나를 가져다가 이스라엘의 진 바깥, 멀리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다 그 회막으로 오도록 하였습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그렇듯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를 결심하셨습니다. 원래의 계획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더 나아가 그들 가운데 내려오셔서 함께 있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막 짓는 일을 추진시키셨습니다. 행여 하나님을 놓칠까 마음 졸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은금과 놋거울, 청,자,혹 색실과 하얀 세마포 등, 여러가지 성막 재료들을 바리 바리 모았습니다. 너무 많아서 모세가 ‘그만, 충분하오. 그만들 가져오시오’ 하고 중단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진영 한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특별한 텐트, 성막(Tabernacle, holy tent)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성막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소(Holy Plance), 여호와의 집, 또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라 하여 ‘회막’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언약궤(법궤)가 있어서 법막, 혹은 증거의 장막이라고도 하고, 그리고 히브리서에는 하늘나라를 두고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생각하여 ‘세상에 속한 성소’라고도 지칭하였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12 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나누어 자리를 잡았고, 성막은 그 한 가운데에 위치했습니다.
성막 모형 (이미지 출처 : http://www.culturalbible.com/?attachment_id=1824)
그런데 이 성막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초미의 관심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성막의 담장, 문, 번제단, 물두멍, 성소 안의 촛대, 진설병, 향로, 성소와 지성소, 휘장, 언약궤, 속죄소, 제사장의 예복, 그리고 성막에서 주요하게 이루어진 제사 제도 등에는 모두 특별한 의미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담장과 문
성막은 사방이 하얀 세마포(가는 삼베 천)로 된 담장으로 둘려 있었습니다. 높이가 약 2.5미터 정도 되어 함부로 담을 넘거나 할 수는 없었지요. 해 뜨는 동쪽, 유다 지파의 진영이 있는 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성막 규모치고는 좀 과하게 넓은, 10미터 너비의 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 즉, 구원자가 오시며, 이 예수님을 통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것도,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다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7,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디모데전서 2:4~6)”
나와 다른 한 생명의 희생
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성막의 뜰에 물두멍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손을 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 역시 때가 묻은 인간이기에 늘 정결하게 씻어야 했지요. 그리고 번제단은 희생 제물을 잡은 후 불로 태우기 위한 기구였지요.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기적인 번제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죄를 지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자 나아올 때마다 희생되는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의 원리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 ‘아사셀의 염소’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록 짐승의 생명이긴 하지만, 죄를 지은 주체와 전혀 상관 없는 한 생명이, 주인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는 희생이 전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막 뜰 (이미지 출처 : http://sheennet.co.kr/kg/%EC%84%B1%EB%A7%891.htm)
성막에는 실내 구조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소와 또 그 안,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지성소입니다.
성소
성막 뜰에서 휘장(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성소가 있습니다. 이 곳은 제사장들만 들어가 촛불을 밝히고 분향을 하고 떡 상에 떡을 진열해 놓았습니다. 떡은 영혼의 존재인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금촛대 역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는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1:4,9)”
분향단의 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과 순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죄인들의 변호자가 되셔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예표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의 향기입니다.
지성소의 휘장
이제 성소를 통과하여 지성소를 볼 차례인데요,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성소는 말들이 힘껏 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휘장(커튼)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죄의 장벽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의 허물을 용서하고 함께 거하기로 작정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휘장을 친히 찢어버리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숨을 거두신 그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촤악~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들이 하나님께로 가기 위한 새로운 길, 살아 있는 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생겨난 것입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7,20)”
지성소
다시 모세 시대로 돌아가서, 휘장을 열면 가장 거룩한 장소, 바로 지성소(the Most Holy Place)가 나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또는 증거궤, Ark of the Covenant)가 있었습니다. 이는 아카시아 나무로 짜고 안팎을 금 도금한 네모난 상자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거룩한 계명을 지키시고 율법의 의를 완성하신 오직 한 사람 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는 떡이 되시는 예수님,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메시아,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상자의 이름이 ‘언약궤’, ‘증거궤’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임을 확증합니다.
언약궤는 속죄소(Mercy Seat)이라는 이름이 붙은 뚜껑이 덮고 있습니다. 이 뚜껑에는 ‘그룹’이라는 이름의 천사들이 날개를 펴고 마주 보는 형상이 있지요. 그리고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애굽기 25:22)”
지성소는 일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여호와 앞에 속죄를 드리기 위한 희생 제물의 피를 가져다가 이 속죄소에 뿌렸습니다. 이는 물론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의미합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죄인이 나아가면 즉시 죽을 수밖에 없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 준엄한 심판의 자리는 은혜의 자리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성막, 황금의 집], J Rouw 참조)
하나님이 설계하고 정하신 방식대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말씀하신 방식 그대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하던 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애굽기 40:33b~35a)”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와 관계 회복을 원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부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성막이라는 제도를 주셨습니다. 제사장의 어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기고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그의 머리에 쓴 관 이마 부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을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대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어 뿌리면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성막의 기구들은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거룩으로 전염(?)시키는 기름이 있다니… 이것은 손만 대면 모두 금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이더스의 손보다 귀한 것이지 않나요?
아무리 해도 정결할 수 없는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대로 희생 제사를 드리며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그 죄가 해결되었다고, 흠 없고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시고, 만나 주신 하나님… 성막과 제사 의식에 대해 하나님께서 까다로운 방식과 규정을 요구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 뒤에 있는 절절하고 애타는 사랑의 언어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수천년 전부터 하나님은 성막과 제사 제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께서 완벽하다고 인정하실 구원의 문, 확실한 구원의 방편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고자 전력을 쏟으신 것입니다.
일러스트 : John Song
성막, 성전, 예수님, 그리고 우리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온 지 2년 되던 해에 완성되어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이 행진할 노정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사사 시대에는 주로 실로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렇게 480년 동안을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왕정 시대가 되었을 때, 다윗 왕은 자기는 화려한 궁전에 있는데 여호와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 작은 천막 형식인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이 지어집니다.
이미지 출처 : http://egloos.zum.com/jerusalem/v/1665261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BC 586년 바벨론 침공 때에 파괴되고 언약궤도 잃어버렸습니다. 후에 포로 귀환 때에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화려한 헤롯 성전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도화, 종교 의식화 되어버렸습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회개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죄를 용서하시고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어졌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은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보시고는 화를 내시며 양과 소를 몰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당신에 무슨 권리로 이럽니까?’ 하며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형벌 받으며 몸이 찢기고 피를 쏟으셨습니다.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말리시고 친히 예비하신 양을 준비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장소 모리아산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진정한 임마누엘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일러스트 : John Song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후 신약 시대에는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자체가 임마누엘의 장소가 됩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 각 사람의 영혼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천국의 본질입니다. 다른 모든 가치는 세상 역사가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에 다 지나가는 것, 과거지사가 될 테지만, 임마누엘만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5~17)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창조와 복음과 장차 있을 영생의 나라까지 아우르는 아주 포괄적인 개념이요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신 이유, 기쁨의 동산 에덴이 에덴일 수 있었던 이유, 타락 이후에도 우리를 버리지 못하시고 성자 예수님을 희생시켜서라도 회복해 내시는 이유, 장차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지속될 목표가 바로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와 허무함과 고독함에 젖어 살던 죄인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짙은 안개 속을 헤매듯 위태롭기 짝이 없던 제 인생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그 누구도 달래줄 수 없었던 내 영혼의 빈 자리에 찾아오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진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팡세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성이 틀어져서 고생해본 경험이 있나요? 관계가 안 좋을 때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반면 문제가 해결되고 화해했을 때에 얼마나 기뻤는지 적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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