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 Agnus Dei (Lamb of God, 하나님의 어린양)
Jotta A – Agnus Dei
Agnus Dei (Lamb of God), Francisco de Zurbara, 1635~1640, 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Agnus Dei란 ‘Lamb of God’, 즉,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뜻입니다.
‘Worthy Is the Lamb’이라는 가사가 반복되어 나오는데요, 이는 형용사를 앞으로 도치시켜 강조하는 문형이지요. 어린양이 얼마나 가치롭고 귀한 것이길래 이렇게 찬양을 하고, 남미에 있는 작은 꼬마 아이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것일까요?
모든 민족과 나라 사람들이 빈부귀천, 남녀노소, 민족과 혈통을 뛰어넘어 한 목소리로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게 될 그 날을 그려봅니다.
오늘의 말씀
레위기 16:8,10,21,22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
Q1. 레위기 16장을 읽어보세요.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은 어떤 절기인지 말해보세요.
Q2. 대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염소, 즉,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로 드릴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그 용도가 어떻게 다릅니까?
Q3. 아사셀의 염소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핵심 짚어보기
피 제사의 원리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먼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 즉, 수치심이었습니다. 인격 대인격으로 서로를 순수하게 사랑할 능력을 잃고 서로를 정욕의 대상, 나의 탐욕을 위한 물건처럼 본다는 것을 감지한 탓이겠지요. 그들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게 뭐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창세기 3:21).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과는 비교할 수 없이 튼튼하고 움직임이 겁나게 좋은 가죽옷! 그런데, 가죽옷이 생겼다는 것은 필경 어떤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요.
에덴 동산에서의 그 첫번째 생명의 죽음에 이어서, 아벨은 자신이 기른 양의 첫 새끼를 희생하여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유월절에도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성막과 성전에서도 제사장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선 왜 이렇게 짐승들이 잡혀 죽는 것일까요. 왜 수천 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런 제사 의식이 제도화되어 수많은 희생양과 희생염소들이 죽어나갔을까요? 왜 희생을 시킬 때에 꼭 피를 흘려 죽게 하고 그 피를 뿌려 무언가를 정결케 하는 의식을 치렀을까요?
피는 생명과 직결되고, 어떤 생명체를 죽여야 하는 것은 죄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짐승이 피를 흘리며 죽어 희생이 되게 하는 것을 ‘피 제사의 원리’라고 합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부여하셨지만, 단 한 가지 금기명령, 선악과 명령을 통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자율과 동시에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 선악과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
과연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인간에게는 영혼의 죽음이 일어났습니다. 죄가 들어온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존재,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생명도 행복도 없음을 알도록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었죠.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거기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을 폐기처분하지 않으시고, 여자의 후손,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실 다른 한 생명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원대한 계획 가운데 인간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고 열심히 열심히 여기까지 이어오셨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민족 공동체 전체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비록 첫번째 언약,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깨어졌지만, 그들과 다시 화해하시고 성막의 제사 제도를 명하셔서, 장차 주실 진짜 언약, 은혜의 복음을 깨닫도록 예습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의 대가로 생명을 내어놓고 죽어야 할 인생들에게 용서와 영생을 선물로 주고자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생명은 피에 있다
생명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무수한 연구와 설들이 있지만, 성경은 생명체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그 피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 짐승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사람의 죄를 씻는 법도를 정한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죄를 깨닫고 인정한다면
이는 결코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옳바른 삶을 살고 싶지만, 부족하고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의식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어기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영적 리더인 제사장, 족장, 민족 공동체 전체, 그리고 평민 개개인에 따라 어떤 희생 제물을 써야하는지,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레위기 4:13,14a)”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어도, 인간이 그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제대로 된 기준이 있어야 무엇이 얼마만큼 잘못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확한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 앞에 정직하고 진실되게 자신을 살피고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합리화하거나 문제를 외면하고 뭉개면 관계성이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안수, 죄의 전가
죄를 깨달으면, 죄인은 희생 짐승을 가지고 성막으로 와 제사장을 만납니다. 리더인 제사장이나 족장이 죄를 범한 경우,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죄가 있는 경우, 혹은 평민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경우, 그 경중에 따라 각기 희생 제물의 종류가 달랐습니다. 지도자는 권한과 영향력이 큰 만큼 책임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은 자기가 데려온 속죄제, 즉, 죄를 속해줄 희생 제물되는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는 이러 저러한 죄를 범했고, 이것이 여호와 앞에 죄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죄인이 인정하고 고백한 그 죄가 짐승에게로 전가되는 것입니다. 짐승은 졸지에 주인에게서 죄를 떠넘기워 자기 죄로 떠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불공평해요! 말 못하는 짐승이 무슨 죄에요!”
맞습니다. 죄를 지은 주인 때문에 죄 없는 짐승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당하고 불공평한 처사를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제도화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억울하신 분, 죄가 없으시고, 하늘의 영광만을 누려 마땅하신 분, ‘내가 왜요? 말도 안 돼!!!’라고 항변해야 할 예수님께서 그 희생양이 되어주신 것이죠. 순한 양처럼, 자발적으로, 기꺼이…. 바로 자기 죄를 떠 안고 죽어야 할 나와 당신을 살리시기 위해...
죄 값을 치렀노라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
중요한 점은 구약에서부터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께 인정되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짐승의 생명이지만, 주인을 대신하여 죽은 희생 제물의 죽음을 보시며, 인간의 죄가 그 대가를 치렀노라고, 즉 죄인이 그 생명을 내놓았노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4:26)
…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31)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35)”
대속(代贖, atonement, redemption), 즉, 누군가 대신 죄값을 치르게 하는 방법으로 죄인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여신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이 느껴지지 않나요?
구약의 제사 제도의 한계
물론,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어 생령이 하게 하신 존재, 영적인 존재인 인간의 생명이 짐승의 생명과 동등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
양과 염소의 피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뒤돌아서 또 죄를 지으면, 또 짐승을 데려와 제사를 드려야 했지요. 내일, 이듬해, 그리고 일생 동안 제사를 반복해도 또 죄를 짓게 되는 현실… 짐승도 불쌍하고, 재산이 축 나는 것도 아깝고, 무엇보다 끝내 변하지 않는 자신의 죄악된 본성에 사람들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룩하게 회복시켜줄 구원자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진짜 어린양이 나타난 것이죠.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히브리서 10:5~7)”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2~14)”
대속죄일, 두 마리의 염소
레위기 16장에는 이스라엘이 일년에 한 번 갖는 대속죄일(Day of Atonement)의 규례가 나옵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대대적으로 속죄하는 날입니다. 이날 만큼은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 중에서도 지극히 거룩한 곳,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도 사람이고 죄가 있으므로 먼저 자신의 죄를 씻은 후에야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속하기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두 마리의 염소를 골라 제비를 뽑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희생 제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피를 흘려 생명을 취할 염소 즉, 여호와를 위한 속죄 염소입니다. 또 하나는 멀리 광야로 떠나보낼 염소, 즉, 아사셀의 염소입니다.
대속죄일, 두 마리의 염소 (이미지 출처 : http://www.godpeople.com/)
먼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 제물로 쓰입니다. 앞서 설명한 원리로 피를 흘려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씻어주는 근거 역할을 하지요.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레위기 16:16)”
아사셀의 염소
두번째, 아사셀의 염소는 여느 제사와는 달리, 산 채로 희생을 당합니다. 피를 흘리고 죽는 속죄제 염소와 대조적으로 살아서 어디론가 멀리 멀리,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 하지 못할 곳까지 짐을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염소가 지고 가는 짐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죄의 짐'입니다.
“산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
(레위기 16:20b~22)”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사셀의 염소를 뒤따르며 ‘지고 가라, 지고 가라’ 하면서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염소가 불쌍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생명줄을 옭죄는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염원 때문입니다. 내게 묻었던 그 죄가 염소에게 묻혀져서 내게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날 뿐만 아니라, 정결한 자로 여호와 앞에 인정되는 것입니다.
아사셀의 염소는 이스라엘 백서의 죄짐을 지고 멀리 멀리, 무인지경 (유대 광야 혹은 골짜기 절벽 등)에 이르면 거기에 홀로 남겨집니다. 거기서 배고프고 목이 말라 고통하다가 외로이 죽게 되지요. 아사셀의 염소가 왜 이렇게 슬픈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까? 이스라엘의 죄를 이스라엘 진영에서 멀리 옮기기 위함이지요.
일러스트 : John Song
예수님,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다
이 규례는 이스라엘이 고안해 내거나 먼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이디어요, 하나님이 명하신 규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죽음이라는 심판에 이르게 하는 죄를 그들로부터 멀리 옮기기 원하시는,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의롭고 성결한 자들로 만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이죠.
이 아사셀의 염소, 누가 생각나십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예수님은 서른부터 3년 동안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사시며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불치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물론이요, 바람과 바다도, 나무도, 심지어 악한 영들도 그 분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십자가를 앞두시고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발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칼을 빼어든 제자들을 말리셨습니다. 그리고 잠잠한 어린양처럼, 잡히시고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처럼 속죄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처럼,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끌려나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높이 달리셨습니다. 그것이 메시아의 최후 과제,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0~14)”
팡세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나요? 그렇다면, 희생 제물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그 죽음으로 인해 죄와 분리되고 정결케 되듯이, 주님 앞에 회개의 고백을 적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당신으로부터 멀리 멀리 옮겨버리신 그 죄짐에서 놓여났나요? 자유롭게 가볍게 뛰어오르며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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