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신가 아닌가 하는 논쟁과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 등 긴장감이 도는 때에,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산(올리브산)은 예루살렘 올드 시티의 오른쪽 산능선이라고 합니다. (참조 및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Andrew Shiva)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오시자 백성들이 다 예수님을 뵙고자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죄 현행범을 잡아왔습니다. 여인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을 힐문했습니다.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간음죄는 무엇입니까?
결혼을 한 남자나 여자가 자기 배우자 말고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죄를 어떻게 다루라고 나와 있습니까?
신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간음죄는 사형을 받을 만큼 중대한 죄입니다. 즉,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며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몰라서 예수님께 여쭙는 것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율법대로 하면 통간한 남자와 여자를 다 잡아왔어야 하는데, 현행범이라 하면서 남자는 어디 가고 힘 없는 여인만 잡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의 덫이 무엇입니까?
죄인들을 멸시하지 않고 환대하며 친구처럼 대해주신 예수님께서 여인에 대해 법대로 하실 것 같지 않았고, 그렇게 하신다면 대중들에게 인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여인을 용서하고 놓아주신다면 명백하게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므로 예수님께 대한 공격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는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저들은 계속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나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니...
간음죄를 지은 죄인을 돌로 치라 하셨으므로 모세의 율법에 부합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자라는 전제는...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나 죄 없소', '나는 자격이 되오' 할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시나 유심히 보았을 것입니다. 거기 둘러선 사람들의 구체적인 죄목들이 적혀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통간 현행범을 가운데 세워놓고 정죄할 때는 보이지 않던 자신들의 죄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그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시는 듯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람 앞에 서서 사람들끼리 도토리 키재기를 할 때, 우리는 남의 죄를 보고 자기 의만 내세웁니다. 상대적으로 의롭다고 느끼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시커먼 죄, 산더미같은 죄악, 그리고 위선과 교만의 죄까지 더해진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수치심과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는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고소하던 자들, 정죄하던 자들이 다 떠난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 여인을 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이는 놀라운 창조주, 구세주 예수님의 용서의 음성이었습니다. 심판의 권세자가 대가 없이 용서와 사면을 선포하시다니... 그 효력과 가치는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값싼 은혜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용서를 베푸시기 위해 훗날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여인이 당할 수치와 정죄와 심판과 죽음을 대신 당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조건부로 들리시나요? 지키기 어려운 단서조항처럼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죽음의 목전에서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의 용서의 음성을 들은 것은 여인에게 일생 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은혜를 온 몸으로, 전 존재로 덧입은 사람입니다. 여인은 훗날 성령의 가르치심에 의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왜 죄사함을 선포하실 수 있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동 감화 받고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죄 근처에도 가기 싫어졌을 것입니다. 평생 주와 복음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결코 행위구원론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믿고 구원 받았으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천국행 티켓 따놓았다고 안심하고 이제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멋대로 죄 지어도 괜찮아! 이런 얼토동토 않은 소리 안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십자가를 통과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하늘로부터 새 생명 주시고, 은혜를 아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의 죄악된 본성에 걸려 넘어지고 사탄의 공격에 휘청거릴지라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인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날까지 그 안에 내주하시며 끝까지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명쾌하고 놀라운 복음에 대해, 가타부터 말들이 많습니다. 복음, 믿음, 구원, 성화, 거듭남 등등 중요한 용어들에 대해서도 재정의하려 들고 듣도 보도 못한, 성경에 없는 개념들을 섞습니다. 복음을 혼잡하게 합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과 관련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목말라 하는 부분이니까요.
이단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매우 쉽고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전통적인 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 이미 많이 듣고 알기 때문에, 직접 대놓고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들도 잘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도 훼방합니다. 이들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들을 씁니다. '단지 믿기만 하면~'이라고 비아냥거리며, 극단적 예정론, 칼뱅주의, 값싼 구원, 입술 신앙, 열매 없는 가짜 신앙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가짜 신앙, 열매 없는 신앙을 비판은 잘 하면서도 정작 본인들도 진짜 믿음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이단들은 다른 쪽, 행위 구원으로 치우칩니다. 하나님과 협력하여 사람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한다, 성령 체험을 해야 한다, 성령 받은 표시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대속의 주로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왕이요 주로 믿어야 한다, 말씀을 끝까지 순종하고 살아내야 한다, 남김 없이 회개해야 한다, 등등, '나'가 주어가 되어 해야 할 일들이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단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평생 죄와 싸워 이기고,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질병도 죽음도 없이 영생불사 해야 한다는 말까지 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 예! 접니다! 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 어디 있나요? 평생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0.1초라고 죄 없는 상태에 있는 자 있을까요?
예수님 믿어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율법을 완전히 이루는 것이 가능할까요?
자기 자신을 붙들고, 어찌든지 자기의 의로움, 완전함을 확인하고 싶은 이 고래심줄처럼 질긴 고집을 어찌해야 할까요?
인간 본성 깊숙히 자리잡은 자기 긍정 욕구와 복음에 대한 불신은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요?
사람 앞에 서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예수님,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진노와 심판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다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1%도 부족함 없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충족된 의, 예수님께서 이루신 의, 하나님의 의,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시는 의, 그 은혜의 메커니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허락하시고 은혜의 세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온 힘과 시간을 쏟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혹세무민하는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혼잡케 하고 양들로 하여금 마음놓고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혼탁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시고, 영혼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보도록, 그 놀라우신 대속의 은혜, 완전하신 구원의 도를 알고 누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역사하여 주십시오. 저의 마음에 담대함을 주시고 말씀을 허락하여 주셔서 복음을 줄기차게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적의 세력에 눌리지 않고 승리하신 주님, 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만 의지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날마다천국한잔::사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복음서] 166. 인자를 든 후에 (요 8:21~30) (0) | 2024.05.04 |
---|---|
[사복음서] 165. 세상의 빛 (요 8:12~20) (0) | 2024.05.03 |
[사복음서] 163. 니고데모의 중재 (요 7:45~53) (0) | 2024.05.01 |
[사복음서] 161. 예수님을 잡으려서 사람들을 보냄 (요 7:32~36) (0) | 2024.04.30 |
[사복음서] 160.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요 7:25~31) (0) | 2024.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