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낸 부하들이 빈 손으로 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부하들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아랫사람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비범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것을 말씀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더욱 고차원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적으로 증명해보이신 능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이 세상에 얼마나 귀한 능력입니까? 어느 누가 그런 권세를 갖고 있단 말입니까? 상식이 있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분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돈과 권력으로 다 될 것 같아도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로보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다들 생각이 있고 보는 눈이 있고 자신에게 가장 유익되는 쪽을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무슨 말을 듣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성실함으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답을 정해놓고,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막무가네로 오히려 그들도 같은 부류, 적으로 몰아세우고 함부로 저주했습니다. 그들의 논리가 무엇입니까?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즉 힘 있고 명성있는 이들이 기준이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고위에 있는 인플루언서들이 똑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지금처럼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나, 부함과 높음이 걸림이 되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여건이 예수님께 대한 태도를 결정지을 요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니고데모는 바리새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을 근거로 그들의 굳어진 편견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그러므로 그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과를 초래할 법적 판결을 할 때에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한쪽 얘기만 듣지 않고 상대방의 반론을 들어봅니다. 혹 개인적인 원한으로 모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판결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종합적으로 판단하도록, 말만 듣지 말고 그 행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라는 도전했습니다.
니고데모의 판단은 어땠습니까? 그는 같은 바리새인이었지만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나 이해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실로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전통과 충돌하는 면이 있으셨지만, 불치병을 고치며 그 많은 초인적인 기적들을 행하여 사람들을 살리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등등,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일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비롯하여 유대 전통과 어긋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뭔가 뜻이 있으실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궁금한 것을 여쭙고, 차근 차근 알아보고 나서 판단하는 것이 신중하고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의 심히 합당한 제언마저도 묵살했습니다. 오히려 '당신도 갈릴리 출신이냐',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라며 지역을 비하하며 일축했습니다. 이렇게 세게 말하면 진짜 그런가 싶습니다. 그러나 영 헛소리입니다.
첫째, 요나 선지자가 갈릴리의 가드헤벨 출신입니다. (왕하 14:25)
둘째, 이제까지의 역사가 현재와 앞으로의 일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경우의 수와 확률을 좀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 선지자 이사야는 빛을 잃은 갈릴리 지역에 다시 빛이 임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사 9:1,2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고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아셀, 스불론, 납달리,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으나 앗수르에 침략 당하고 속주로 편입되어 이방처럼 멸시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아기가 태어나고, 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금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바리새인들은 가장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사노라 자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이 가리키는 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요, 전능자요, 영존하시는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박해하였습니다. 내가 옳다, 나는 다 안다, 내가 하나님 편이고, 내 편이 하나님 편이다 하는 자기중심적인 교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긍정과 자기 확인, 자기 만족을 위한 신앙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아는 것은 오직 제가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속하시고 구원과 영생 복락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 뿐입니다. 그 외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또한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나를 중심으로, 내 지식과 내 유익과 나의 만족감을 위해 세상을 보는 한계적인 판단력을 지닌 자임을 인정합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교만과 아집과 독선을 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하나님 편에 서도록 늘 깨어 있게 하시고, 하나님께 여쭙고, 정직하고 순수한 눈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함부로 악담하거나 미워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위하여 기도하는 자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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