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삶의 열매
세상 보기: 고(古) 이병철 회장의 철학적, 종교적 질문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을 일구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부를 누렸던 고(古) 이병철 회장은 말년에 스물 네 가지의 철학적, 종교적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신의 존재 증명이나 악과 고통의 문제, 신앙인들의 언행 불일치 문제 등입니다.
(참고: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916929)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보는 우주 만물의 근원,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 누구나 들으면 수긍이 갈 만한 대답,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믿음직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습니다. 머리 아프게 고민해봐도 별 뾰족한 답도 없어 보이고... 그래서 삶에 치이다보면 대부분은 미루고 덮어두게 되지요. 신앙이 있노라 하는 종교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나, 사이비 이단들을 보면 환멸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꾀를 내어 ‘살 것 다 살고 나이 들어 여유 생기면, 죽기 전에 작정하고 고민해보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듣자 하니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고들 하던데...’ 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나이 들면 내세 보험 들듯이 믿어주지 하는 얄팍한 마음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천만에 만만에 콩떡!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걸기에는 너무 위험 천만한 낙관론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성이 있는 존재이므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의지적으로 믿고자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알고 경험한 만큼, 그 앎에 기반하여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혹은 직접 목격하지 못한 일에 대해 갖는 신념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로마서 10:13,14)"
유한한 존재요 필멸의 존재들로서, 이 글을 대하고 계신 바로 이 순간, 조금이라도 총기가 살아 있을 때, 바쁜 걸음 잠시 멈추고, 마음 깊이 꾹꾹 내리누르던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게 어떨까요? 이 책이 그 여정에 충직하고 친절한 벗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Q1.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Q2.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지, 정, 의의 영역 중 지성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감정과 의지로 도저히 안 되던 것들이 앎과 이해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던 경험이 있나요? 아는 것은 가치관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Q3.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실제적인 행동과 그 열매들은 어떤 관련을 가질까요?
핵심 짚어보기
지구별에는 70억도 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갖는 공통점도 많고, 또 사람 사람마다 생각이나 느끼는 점이나 삶이 참 다르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궁금하고도 신기합니다. 사람의 인격은 지, 정, 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경험하고, 배우고, 교정되며 세상과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안경, 관(觀)으로 굳어집니다. 그런데, 앎과 감정과 의지 중 누가 가장 힘이 셀까요? 무엇이 우리의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좌우할까요? 대장은 바로 '앎'입니다.
살아가면서 쌓이는 지식과 직접, 간접적인 경험이 쌓여 그 인격의 ‘앎’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앎은 감정과 의지와 행동을 리드합니다. 즉,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도, 의무와 당위성도, 근본적으로는 지적 영역, 즉, 무엇을 진리, 사실로 아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지도자도 교육에 집중하고, 심지어 독재자들도 먼저 미디어를 장악하려고 하지요. 결국, 앎, 인식의 영역은 지, 정, 의 세 가지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앎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다만,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과 대조가 되고, 또 그것을 객관적으로, 경험적으로 증명해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나 자신마저도 의심과 회의가 들 때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믿음이 확고할수록,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진리요 사실이요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즉 그 자체로 ‘앎’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1,2)"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진리라고 믿는가가 그토록 중요할찐데,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영생, 그것은 역사상 인류가 얼마나 간절히 원해온 것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앎이 영생과 직결된다고 말씀합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정말 대단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갖춰야 할 것 같은데, ‘앎’라고 하다니요. 놀랍지 않나요?
여기서의 앎이란, 수박 겉핥기 식의 얕은 지식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이 쓰여진 히브리어 원어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여러 가지고 구분됩니다. 오늘 본문의 앎이란, 통성명을 해본 지인이나, 오감으로 관찰하여 아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마치 몇 십 년을 같이 산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과 같은 남다른 경험과 인격적인 앎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진정한 앎과 그 앎의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이러한 앎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하심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질문과 답변과 진솔한 대화가 있습니다. 오해와 편견의 베일이 벗겨지고 갈등이 해소되는 화해와 벅찬 해우가 있습니다. 잘못된 지식, 속고 살았던 왜곡된 지식이 교정되어 지식 체계까지도 새로워집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땅에서는 사람들 간의 인격적이고 올바른 사귐과 화해의 길이 열립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치료되고 깊고 오랜 상처가 낫게 됩니다. 지독하고 끈덕지게 우리 인생에 어두움을 드리우던 허무와 고독과 두려움이 안개처럼 걷히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로새서 3:9b,10)"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가이드 줄 만큼 줬으니 성경 열심히 연구해보고 나 잘 찾아와봐’ 라며 팔짱 끼신 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진실을 알고자 하면, 기꺼이 그 편에 서고자 하면 보여주시고, 알게 하시고, 마침내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소유하고,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 올 한 해, 어마어마한 가치인 ‘영생’이라는 선물을 기대하며, 진지한 마음으로 말씀을 보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공부해 보아요~*
팡세
그 동안 가졌던 철학적, 종교적 질문을 적어보세요. 특히, 기독교에 대해 가진 의문점들을 적어보세요.
오예~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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