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콘텐츠 큐레이션

[영화] 진저 앤 로사 (2012)

by songofkorea 2017. 3. 23.


 

(감독) 샐리 포터

(주연) 엘르 패닝, 앨리스 엔글레르트

자료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3867


선악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판단력을 얼마나 날카로우며, 또 그것을 알기에 덕지덕지 회칠을 하며 우리는 얼마나 두꺼운 가면을 쓰는지요. 그러나 얽히고 설킨 사회적 관계망을 다 피해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 판단의 화살들에 찔려 우리가 두 손 들어 투항하고, 기만과 모순의 가면을 벗게 되는 것, 아프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고 복된 일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의 진저가 해냈지 뭡니까. 


1960년대, 반핵 운동에 뛰어들어 행동할 줄 아는 용기, 무관심하고 소시민적인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든 인류의 공멸을 막아야 한다는 비장한 사명감, 자유롭고 지적인, 멋진 영혼으로서의 아버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진한 우정, 함께 있기가 버거우면서도 연민을 느끼는 엄마,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성당의 어른들... 시인 감성 터지는 십대 소녀 진저가 가진 것들이었습니다. 


진저는 소녀다운 쾌활함과 순수와 감성으로, 격변의 시기를 견뎌내고 또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너무 혼란스럽고 아파서, 인류를 날려버릴 핵무기보다 더 크고 치명적인 것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죠. 


아버지는 자유와 주체성을 얘기하지만, 아버지를 존경하는 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딸에게,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용인해줄 것을 요구? 아니, 강요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해줄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선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것은 '무책임함'이나 '가해'를 비난하지 말라는 또 다른 이기적인 강요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기중심적인 탈선, 그 조차 자유이고 자신의 권리라 여기던 얄팍하고 위태롭던 합리화의 유리벽은 오열하는 딸의 폭로, 어머니의 자살 기도라는 철퇴를 맞고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종국에는 아버지도 딸 앞에 가면을 벗고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하게 되지요. 


신앙을 미개한 일로 취급하며 멋진 미사여구를 구사하던 아버지는 막상 자신의 감정을 따르려 할 때, 인간다운 도의와 사랑하는 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저버렸습니다. 반면, 매우 신앙심 깊은 양 그저 모든 것을 신에게 맞길 뿐이라 말했던 친구도, 신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 없이 자기 욕망에 충실했습니다. 

차라리 바깥 세상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용감하게 거리로 뛰쳐나가 외칠 수 있는데, 바로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선악간의 판단, 마음, 선택을 바꾸어내는 것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아니, 진저는 바꿀 엄두를 못 냅니다. 그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쿨하고 자유분방한 사고로 이해해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악은 분명 주위에 고통을 줍니다. 진저는 아버지와 친구에게서 느끼는 배신감, 가련한 어머니 앞에서, 진저의 내면은 그야말로 핵폭탄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결국엔, 뻥~


그래도 진저는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으며, 많이 성장했습니다. 평소 홀대하고 무시하던 엄마 입장에 설 수 있었고, 멋있고 말이 통하는 것 같던 아빠의 모순과 한계도 보았습니다. 모두가 살길 바란다는 고백, 가장 아픈 순간까지도 시를 쓰며 친구를 향해 사랑을 고백해내는 소녀의 멘탈이 존경스럽습니다. 시대가 주는 성숙함에서 나올 수 있는 너그러움이었을까요? 


김교신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죠.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시대에는 '위선도 그립다'고. 

아닌 척, 가식을 떨고 위선을 떤다는 것은, 적어도 악은 악이라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반증일 테니까요.  


사랑은 보편적인 인간 본능 측면에서 보아도 배타적인 것이요, 생명이 관련된 문제요, 가정과, 상대 배우자와, 자녀들, 그 외의 여러 인간 관계가 얽힌 문제이므로, 타인에 대한 신의와, 책임을 포함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도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그 가치, 누군가의 이기적인 감정에 의해 깨어지기 쉬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이겠지요. 


출생 자체로 엄마의 예술 인생에 발목을 잡은 미안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을 가진 진저, 그래서 바깥 세계의 불의와 악에 대해서는 대차게 항거해도,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는 할 말 못하고 어떻게든 인내하려 애썼던 소녀, 그렇게 악의 없이, 애쓰고 애쓰다 폭발한 것이기에 진저의 눈물은 사람들의 가면을 벗겨냅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정신을 차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한 마디 : (눈물 범벅이 된 진저를 가리키며)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좀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