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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 복음이 궁금해?

38. 옛 언약, 새 언약

by songofkorea 2019. 7. 31.

추억의 히트곡 큐레이션: By the Rivers of Babylon

By the Rivers of Babylon (src: http://www.lucascleophas.nl/?p=6149)

노래: By the Rivers of Babylon (Bony M, 1978) 

이 노래는 시편 137편, 뒷부분은 시편 19장 14절의 내용을 기초로 합니다. 자메이카의 Melodians라는 그룹이 불렀고, Bony M이 디스코풍으로 리메이크했지요. 아,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라는 번안곡(?)으로 유명하구요. ^^;

많은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계속 우상숭배와 범죄로 일관했던 이스라엘… 그들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남유다 역시 BC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 당합니다. 그들의 신앙정 정통성이자 자부심이었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성전은 파괴되며, 유대인들을 대거 포로로 끌려가게 되지요. 이 시편에는 포로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잃어버린 고향, 그리고 자유로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137편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Psalm 137

1.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2. We hanged our harps upon the willows in the midst thereof.

3. For there they that carried us away captive required of us a song;
and they that wasted us required of us mirth, saying,

Sing us one of the songs of Zion.

4.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Psalm 19:14

Let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acceptable in thy sight, O LORD, my strength, and my redeemer.

  

오늘의 말씀

예레미야 31:31~3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Q1. 히브리서 8장과 예레미야 31장을 읽어보세요. 옛 언약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새 언약을 맺고자 하십니까?

 

Q2.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해 맺은 옛 언약은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Q3. 새 언약의 특징과 내용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었습니까?

 

핵심 짚어보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와 비슷한 시기에 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역시 BC 586년 남유다의 멸망의 시기를 살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조국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심판을 예언해야 하는 그의 심정은 절절했지만 이스라엘은 끝끝내 회개치 않았습니다. 파괴되는 예루살렘 성전과 조국의 멸망을 눈 앞에서 보고야 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결코 자기 백성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 목이 곧고 교만하여 미리 경고를 해줘도 듣지 않고 굳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키게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라도 너무 절망하지 않고, 아주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예레미야 선지자는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도 함께 전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29:11~14)”

예레미야 선지자는 직접 사촌으로부터 땅을 구입하여 회복의 확실성을 행동으로 역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더욱 중요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계시됩니다. 바로, 새로운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예레미야 31:31)”

하나님은 옛날 언약과 다른 새로운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구약 (Old Testament)’, ‘신약 (New Testament)’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무엇이었으며, 왜 새로운 언약이 나오게 되었는지, 새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봐야겠지요.

옛 언약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상태의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후 맺으신 언약입니다. (27강 ‘시내산 언약’ 참조). 하나님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게 명하셔서 이스라엘의 의사를 타진해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애굽기 19:5,6,8)”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하나님 사이에, 쌍방간의 동의와 합의 하에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의무 조항은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것, 즉, 그 계명과 율례를 준수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되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곧바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언약 내용을 돌판에 새겨주시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왜 안 내려와? 우릴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하며, 은금을 녹여 부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가 든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중,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번째 계명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에서 이미 실패한 상태였습니다. 모세는 너무 허무하고 기가 막혀 돌판을 깨뜨려버립니다. 모세가 열심히 용서를 구하고 다시 율법의 돌판을 새겨 내려왔지만, 이스라엘은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이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를 고발할 뿐이었습니다.

새 언약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도 인류 역사를 접어버리지 않으시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언약을 여지없이 깨뜨린 후에도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다시금 계명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돌판에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십계명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지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곳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고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지만, 희생 제물을 통해 죄를 정결케 하는 제사 제도를 마련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허물진 인생들에게 눈높이를 낮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발전을 따라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 계획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31:33,34)”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이스라엘 편에서 지켜내야 할 의무 조항이나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계획과 결심만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을 더 이상 돌판에 새겨 ‘지켜라’ 하며 외부에서 제시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에, 그 마음에 기록된다고 하십니다. 법이 외부의 압력이나 준거가 아니라 내재화된 것, 그 당위성에 대해 지식적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더 좋아하는, 자신들의 성향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더 이상 누가 여호와를 알도록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되고, 작은 자나 큰 자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싶어도, 부패하고 타락된 본성 때문에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에는 이스라엘의 의무 조항이 없이, 일방, 즉, 하나님 편에서의 용서의 결심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죄악을 범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그들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요인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일방의 노력만으로 이루시는 새 언약을 ‘은혜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는 것 없이, 조건 없이,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혜택입니까? 어떻게 가능케 됩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23:5,6)”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 그 날이 이르면, 다윗에게서 나온 한 의로운 가지, 즉,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우리의 의 (THE LORD OUR RIGHTEOUSNESS)’입니다. 과연 말씀대로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죄인처럼 형벌 받으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셨습니다. 고대로부터 언약에 대한 당사자들의 생명을 건 신실한 맹세를 표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뿌렸듯이 예수님은 그 보배로운 피로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새기도록 예수님은 성찬 예식을 명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3~26)”

 

진짜를 주기 전에 먼저 율법을 주신 하나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현장에서부터 여자의 후손, 즉,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셔서 대속의 죽음을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실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왜 바로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왜 옛 언약,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부 언약, 이스라엘이 연약하여 실패한 언약을 먼저 주셨을까요?

지난 19강, 야곱 이야기에서 성경에 나오는 장자와 차자 구조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가문의 혈통을 잇고 리더가 될 사람입니다. 책임도 크고 권한도 컸습니다. 재산도 다른 형제들보다 배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장자와 차자의 비중이 뒤바뀌는 구조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닌 아벨을,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에서가 아닌 야곱을,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택하셨습니다. 출생은 차자이고 동생인데, 영적인 측면에서 장자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앞선 것이 아니라 후자,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이 진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2,24)”

율법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너무 어렵다거나 나빠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타락한 본성, 부패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로움이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1~24)”  

한 마디로, 우리가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냥 의롭다고 간주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거져 얻는 것, 공짜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이것을 여러 차례 계시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 가인을 낳았을 때 매우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겪어보니 그 기대가 다 무너져 동생의 이름을 ‘허무’, ‘이슬’이라는 뜻의 아벨이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과 기대가 없어진 동생은 오히려 그 인생과 제물에 대해 ‘믿음으로 드린 더 나은 제사’라고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셔서는 인간적인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기까, 아브라함에 100세가 되고 아내 사라는 폐경기를 지나기까지 일부러 지체하셨습니다. 몸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나 첩들이 난 다른 아들들은 다 인정하지 않으시고, ‘독자’ 이삭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창세기 22장 참조). 이삭만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난 아들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아브라함이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4,26)”

뿐만 아니라, 야곱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들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을 택하신 것,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 할아버지 야곱이 차자 에브라임을 더 앞세우고 축복기도한 것 등, 모두 장자를 중시하던 당대의 전통과 상식에 위배되는 일들이었습니다. 고개가 갸웃해지는 장자와 차자의 전복 사건들은 모두 옛 언약과 새 언약 중 하나님이 정말로 의도하신 것은 차자처럼 올 새 언약임을 말해줍니다.

율법을 장자처럼 먼저 주신 이유는, 그 율법을 통해서 다음에 주실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율법이 그 본래 목적대로 순기능을 발휘할 때, 사람은 죄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구원자를 갈망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부르짖은 ‘너 자신을 알라’, 키엘케고르가 얘기한 윤리적 실존에서의 진정한 자기 절망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놀라운 구원의 소식, 기쁜 소식, GOOD NEWS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죄악됨을 다 아시면서도 심판과 형벌이 아닌 용서와 구원을 작정하신 하나님, 교만하고 어리석은 착각이 깨지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도록 율법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때가 되어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게 하신 하나님, 그 지혜와 긍휼하심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합니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찬양합니다.

일러스트: John Song

팡세

살면서 지키고자 하는 철칙이나 철학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기준에 비해 자신이 얼마만큼 의롭다고 생각하나요?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