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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 복음이 궁금해?

31.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여호와 샬롬

by songofkorea 2017. 3. 1.

역사 큐레이션 : 약속의 , 하나님의 기대,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상은

모세를 리더로 하여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훈련 기간을 마친 후 여호수아를 리더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라합 이야기는 그 첫 관문 여리고 정복 때의 이야기였지요. 가나안에 들어가 사울, 다윗, 솔로몬 등 왕정 시대가 되기 전까지를 사사 시대라고 부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듣기만 해도 우웩스러운 가증스러운 일들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곳곳마다 산당을 만들어 말 못하는 목석을 신이라 절하며 복을 빌었습니다. 성적 쾌락을 신성시하여 종교의식 후엔 늘 창녀와 같은 여사제들과의 난잡한 성행위를 즐겼습니다. 심지어 몰렉이라는 신에게는 어린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법도를 알고 지키며 온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모범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 때에도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가나안의 풍속에 영향을 받고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착 생활을 하고 안정과 평화를 누릴 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이 극심해지면 채찍을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때마다 주변 민족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모압, 미디안, 블레셋 등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추수 때만 되면 쳐들어와 싹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회개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제발 좀 구원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士師, 재판관, judge, 군사 지휘관으로 일어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백성들 가운데서 영적, 정치적 리더 역할을 맡음)들을 세워 해방을 주셨습니다. 유명한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입다, 삼손 등이 바로 이 시대에 활약했던 인물들이죠.  

그러나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도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사기는 타락 --> 이민족 침략  --> 회개  --> 사사를 세우심  --> 구원과 해방  -->  평화 시대 --> 다시 타락…’ 이라는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jesusplusnothing.com/studies/online/judges1.htm

백성들 뿐만 아니라 사사들과 영적 지도층인 레위 지파 사람들까지, 속속들이 타락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승리 후에 처첩을 많이 두었고 금 에봇을 두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사 입다는 승리를 감사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께서 엄히 금하신 인신 제사를 맹세했습니다. 미가라는 부잣집 아들은 성직자 혈통인 레위인을 스카웃하여 자기 집을 위한 사적인 성직자로 삼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를 완력으로 누르고 더 큰 연봉과 명예를 미끼로 그 레위인을 데리고 가버립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들이 전쟁에 이길지 하나님의 뜻을 묻게 합니다. 원하는 답을 들은 그들은 평화롭게 거하던 라이스라는 곳을 침략하여 초토화시키고 그 땅을 빼앗습니다. 어째 좀 답답하죠? 하나님을 알고 믿는 듯 한데 하는 행동은 영 아닙니다.

또 다른 예를 보면, 레위 사람 하나는 성직자임에도 첩을 두기도 하고, 여행하다가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을 만나자 자기만 살겠다고 그 첩이 겁탈 당하게 내어줍니다. 첩은 밤새 괴롭힘 당하다가 죽고 말지요. 다음날, 레위인은 베냐민 불량배들의 악행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며 온 이스라엘을 선동합니다. 엄청난 죄를 짓고도 자기 성찰과 회개는 없이 남들의 악행에 대해 분개하다니그리하여 내전이 발발하고,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와 통혼하지 않겠다는 섣부른 맹세까지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하나가 멸절될 위기에 처했고 사람들은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맹세는 지켜야겠고겨우 생각한 것이, 베냐민 지파 생존자들에게 명절 축제에 실로에 온 처녀들을 보쌈하여 아내 삼으라고 조언하고 이를 묵과해 줍니다. 납치를 종용하며 자신들은 맹세를 지켰노라 자랑하다니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죠? 사사기는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가면서 벌이는 이 모든 엽기적이고 파렴치하고 위선적인 죄악상은 낱낱이 고발합니다. 맨 마지막에 이런 코멘트 한 마디와 함께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일찌기 모세는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도, 여수룬,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스라엘이 부하고 윤택해질 때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노엽게 할 것이라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심판의 대상이었던 가나안 민족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법도를 알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기에, 그들의 죄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끝없이 우상숭배와 죄악을 치닫는 이스라엘, 사사들과 제사장 그룹과 지도층마저 다 치명적인 약점과 죄가 있는 인간들그 광란의 도가니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영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예 손 떼버리지 않으시고, 그릇 가면 채찍을 드시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면 속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구원을 베푸십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참된 왕, 참된 구원자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구원자를 예비하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야기에는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미디안 족속에게 압제를 받을 때의 일입니다. 사사 기드온에 관해서는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지만, 특히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직접 찾아오신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사사기 6:22-24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Q1. 사사기 6장을 읽어보세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공격을 받고 있었나요? 기드온은 어떤 처지였나요?

 

Q2. 누가 기드온을 찾아왔나요? 그는 기드온에게 어떤 말을 했나요?  

 

Q3. 기드온이 확인하고 싶었던 진실이 무엇인가요?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를 뵌 것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왜 그렇습니까?

 

Q4. 하나님의 사자,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는 모두 누구를 가리킬까요? 여호와 샬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죽음의 공포 가운데 평화가 선포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핵심 짚어보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셔서 압제를 받게 하셨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속 동굴에 숨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파종 때면 메뚜기 떼처럼 까맣게 쳐들어와 토지 소산과 가축을 헤치고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괴로워 대답 없는 우상들 대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압제 받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신 그들의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까닭이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철 없는 어린 아이를 초달하는 이유가 벌이 목적이 아니요 교훈을 주고 깨우치게 돕기 위함이듯,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의 눈을 피하여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사사기 6:12)”

기드온의 반응을 보면, 이 뜬금 없는 인사는 그의 절절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곧장 도대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면, 어떻게 미디안과 이민족들이 우리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옛날 이집트에서 구원하시던 그 영광스러운 무용담은 다 뭐란 말입니까? 지금은 하나님이 우릴 버리신 게 아닙니까?’ 하며 따져 물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구한 설명도 없이 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사사기 6:13)

 

문제 제기를 했더니, ‘그렇지. 안 그래도 일꾼이 필요하던 차에잘 됐다. 니가 가서 해결해라하는 격입니다. 기드온은 얼른 꼬리를 내렸습니다. 자신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극히 미약한 집안인데,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느냐 반문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사사기 6:16)”

 

, 여러분이 기드온이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숨어서 나 하나 살 길을 모색하던 기드온, 그가 갑자기 민족을 구원할 용사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지적질하고 불평하는 것은 참 쉽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운데 뛰어들어 해결을 해야 한다면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를 통해 전해 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으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든든히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여쭈었습니다.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은 대화 내내 Lord’라 부르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예물을 가져올 테니 기다려달라 요청한 후,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었습니다. 소쿠리에 고기를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이 그대로 한 뒤, 여호와의 사자는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벌써 떠나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순간, 기드온은 무엇을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자기와 대화하던 존재가 여호와의 사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궁금했고, 왜 이민족의 침략에서 구원해주시지 않는지, 따져 묻고 싶었고, 그리고 이렇게 뜻밖에 대화도 하고 증거도 보았는데,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고 왜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느끼는 간극이요, 이질감이요, 존재가 소멸될 것만 같은 공포감이었습니다. 그는 곧 죽을 것같은 생각에 호소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사사기 6:22)”

 

자세히 보면 기드온과 말씀하고 있는 분은 사사기 6장 본문에서만여러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      11: 여호와의 사자,

-      13, 15, 기드온의 호칭 : 오 나의 주여

-      14, 16: 여호와

-      20: 하나님의 사자

 

기드온과 대화한 존재는 여호와의 사자, 아니, 여호와 그 자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그 본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 성육신 하기 전에 선재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만나고, 항변하고, 기다리시라 하고,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을 본 기드온이, 갑자기 현타가 와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감정을 다 빼고 얘기해도, 물리 법칙처럼 당연한 영적인 실상으로,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일찌기 모세도 하나님을 뵙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바위 틈에 숨게 하시고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게 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

 

여호와의 존전에서 죄인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난 데자뷰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던 중,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잠에서 깬 그의 반응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느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게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세기 28:16,17)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고 축복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이 보전된 것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세기 32:30) 

 

기드온 이후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도,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난 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으로 거룩하신 주님을 보고는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탄식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경험한 후, 베드로가 느낀 감정 역시 그 거룩하신 존전에 설 수 없는 자기 인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 시대에 언약궤가 떨어질까봐 손을 댄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심지어 언약궤 뚜껑을 열고 들여다본 백성들도 죽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 번만, 희생 제사로 죄를 씻은 후에야, 그것도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경우들은 뭘까요?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 시내산 언약 때의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현현하신 여호와와 대화하고, 그 앞에서 먹기도 하고, 심지어 밤새 씨름까지 하고도 살아남았습니다. 나방이 불 속에 뛰어들고도 살아남았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처럼, 이 대면 가능한(approachable) 하나님은 어찌된 영문일까요?

 

죽을까봐 슬퍼하는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사사기 6:23)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단의 이름을 여호와살롬(여호와는 평화이시다)’이라 하였습니다. '여호와살롬', 그것은 그 거룩하심 앞에 소멸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그 불타는 듯한 심판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실 여호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드온에게, 먼 훗날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시며 평화를 선언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사탄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께 대해 전쟁을 도발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망치고 그 마음에 피멍이 들게 하였습니다. 전쟁에 지고, 막대한 보상금을 내며 갚고 갚아도 끝이 없는 빚더미에 앉은 자들, 잘못을 인정하거나 진정어린 사과도 하지 않는 자들, 창조주와 원수처럼 되어 화를 자초하는 자들에게 해결의 능력은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보상을 하시고 사태를 수습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것입니다. 이를 미리 바라보시고, 지금 기드온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인생들을 향해 샬롬, 평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에베소서 2:14-17)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4:25, 5:1)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2)”

 

듣기 나이스한 그 흔한 인사 '샬롬'은 실상은 예수님의 놀라운 희생을 기반한 것입니다. 감히 창조주 하나님께 대들었다가 죽음과 심판을 선고받아야 할 일생들에게, 죽음 대신 평화를, 샬롬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그 사랑을 감사 찬송합니다.

 

팡세

누군가와 사이가 나빠져 어려움에 빠지거나 괴로웠던 적이 있나요? 화해하게 되고 관계성이 회복된 계기가 무었이었나요? 그 때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해지고 편안해졌는지 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