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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 복음이 궁금해?

40. 아름다운 의의 예복

by songofkorea 2019. 7. 31.

영화 큐레이션 : 나니아 연대기 (2005)   

나니아 연대기 해당 장면 보기


C. 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을 영화화한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백색 마녀 제이디스는 달콤한 과자에 유혹되어 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린 에드먼드의 비겁함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사자 아슬란은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계속 에드먼드를 송사하는 백색 마녀에게 무섭게 포효합니다. 잘못도 사랑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불의한 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돌에 새겨진 전설대로 죄 없는 자로서 에드먼드의 죄값을 대신 치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슬란의 죽음과 부활 앞에 백색 마녀는 에드먼드를 송사할 꼬투리를 잃게 되고, 에드먼드는 그 사랑에 감동되어 정말 늠름한 왕자로 성장하게 되지요.  

 

오늘의 말씀

스가랴 3:4,5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스가랴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Q1. 스가랴 3장을 읽어보세요. 대제사장은 어떤 위치의 인물입니까?

 

Q2.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사단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Q3.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변호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는 것은 무엇을 예표합니까?


Q4. 마태복음 22장을 읽어보시오. 왕의 잔치에서 주어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핵심 짚어보기

이스라엘은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여러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경고한 대로 BC 586년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고 맙니다. 선민으로서의 자긍심은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과 함께 땅에 떨어졌고, 그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회복에 대한 예언대로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귀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임재요 함께 하신다는 중요한 상징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흥과 회복을 원치 않던 방해세력 때문에 성전 재건은 오래도록 중단되었습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금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처럼, 오실 메시아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예언을 풍부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스가랴서에는 메시야의 왕 되심과 제사장 역할, 이스라엘의 거역,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 결국 승리하셔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새싹, 순, branch)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스가랴 6:12,13)”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9)”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스가랴 12:10)”

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

스가랴는 여덟 가지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중, 3장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는데 그 오른쪽에서 사탄이 그를 대적하였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이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지도자요 대표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옷도 더러운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집행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하는 논리로 여호수아를 대적한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네 이놈! 대제사장씩이나 되가지고 그렇게밖에 못하냐? 그게 네 최선이냐? 너 때문에 저 원수같은 사탄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이냐!’ 하는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목격한 것은 전혀 뜻밖의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스가랴 3:2)”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타다 만 그슬린 나무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송사하는 사탄을 오히려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스가랴 3:4,5)”

그림 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SkX&articleno=379

스가랴가 본 이 환상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의 실존이 죄로 오염되어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것같은 상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 사단이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들추어내며 정죄할 때에 할 말이 없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대제사장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허물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죄를 먼저 씻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 제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 64: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옷,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고, 정결한 관을 씌워 주십니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높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일은 장차 허락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가능케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 땅의 죄악을 단번에 제거하셨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다니엘 9:24)”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13:1)”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스가랴 3:8,9)”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시금 존귀한 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가출하여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맞아주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공부도 바쁘고 삶이 버겁던 대학 시절, 저는 복음동아리 동료로부터 저의 신앙생활 태도에 대해 쓴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쁜 의도가 전혀 아니었지만, 나의 죄짐과 인생짐 위에 종교의 짐까지 얹어서는, 금방 깔려 죽을 듯이 낑낑대던 저로서는 철퇴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너져내려 ‘이렇게 더는 신앙생활 못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알아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변화시켜 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오늘 밤 저를 데려가 주세요’ 하며 생떼를 쓸 정도로 절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너를 사랑한다”

저는 그 말씀의 내용에 더욱 놀랐습니다. 전혀 제가 예상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아마도 저는 ‘그 많은 말씀을 듣고도, 그렇게 많은 은혜를 알고도 그거 밖에 못 하니? 왜 나를 좀 더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거니?’ 하시는 책망의 음성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날 봐도 한심한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다니....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여 시간이 흘러 저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불에 그슬린 부지깽이같은 저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은 분노와 정죄와 경멸의 눈일 것 같은데, 그러셔도 우린 할 말이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순결하고 흠 없고 사랑스러운 자녀로 보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의의 옷,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23:6)"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하여 지어 입히시는 의의 옷, 깨끗한 예복,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의 비유를 보면, 원래 잔치에 초청되었지만 거절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는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계시하시고 성취하신 메시야를 배척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또한 공석이 많아져 계획에 없이 뒤늦게 초청된 이방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원래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 그나마 율법이 있고 노력이라도 했던 이스라엘과 비교해볼 때 훨씬 더 죄악되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자격 없는 자들도 가리지 않고 잔치에 초청하고 예법대로 하객들에게 예복을 나누어 주었건만, 그 중 어떤 사람이 나누어준 예복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2:12,13)”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격 없는 자들에게 거져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복은 우리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참으시고 이 세상의 죄악을 제거하신 예수님,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와 허물을 깨끗이 씻기신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팡세

마음에 품은 생각들이 투명하게 다 보인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독한 생각, 더러운 생각들은 없나요? 깨끗하고 아름다운 예복으로 가릴 수 있게 해 주는 복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