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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 복음이 궁금해?

04. 내 안에 진리가 있는가?

by songofkorea 2016. 1. 24.

요예~ 팟캐스트 

영화 큐레이션 : 메멘토 (2000)

이미지 출처 : http://achievstar.tistory.com/279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특이한 스토리 기법으로 많이 회자됩니다.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채 아내를 해한 범인을 찾아 복수해야 하는 주인공. 관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주인공과 함께 혼란스러워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범인을 좇고, 또 주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곤 하다가 급기야 그 반전에 넉다운 되고 맙니다.

그 독특한 영화 기법보다 인상 깊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순됨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 한 순간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그만 감정에 치우쳐 의도적으로 잘못된 단서를 기록함으로써 다음 순간엔 자신을 도와주던 사람을 범인으로 알게 됩니다. 그간의 절박하고 치열한 행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주인공의 삶은 안쓰럽고 아픕니다. 한계적인 정보로와 판단력으로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진실을 보여줘도 결국 그 진실을 걷어차 버리는 모습... 이 영화는 어쩌면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인간의 인식과 판단과 선택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오류에 빠지기 쉬운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어찌든지 제대로 살아보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사방이 지뢰밭입니다. 돈 사기도 많고, 종교 사기도 많습니다. 정치와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시장의 나물 파시는 할머니도, 대학교의 시험장에서도 거짓말과 속임수가 판을 칩니다. 그리고 그 너저분한 합리화와 타협의 한 가운데에 나 자신이 있습니다. 내 안에 진리가 없을뿐더러, 누군가 진리를 말하여도 그 편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직전의 기록이 다음 선택과 행보를 결정짓는 유일한 단서가 아닌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경험을 통해 그릇 판단하는 나, 오해하는 나, 살짝쿵 거짓말 하는 나를 압니다. 그리하여 이제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오관으로 감지한 것까지도 의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영원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단기기억상실증의 주인공처럼 한계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여러 상반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조각 조각 흩어진 정보들에 의존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찾아나가야 할까요? 언제 진리를 찾았노라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Q1.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진리가 있다면, 어떻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요? 만약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Q2. 당신은 구원이 필요합니까?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합니까? 당신을 속박하고 억누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궁극적으로 어떤 삶, 어떤 상태를 원하십니까?

 

핵심 짚어보기

저는 어린 시절 공상을 잘 하였습니다. 상상을 할 때에도 현실성을 발휘하여, 땅값 비싼 도심을 벗어나 지하에 대규모의 아지트를 짓고, 인공 태양까지 띄웠습니다. 그 세계에는 꼬맹이가 보기에 온갖 좋은 것들, 맛있는 것들이 무한히 공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동전이 계속 나오는 자판기, 상콤 달콤한 요구르트가 계속 나오는 수도꼭지, 뭐 그런 것들이죠. 그곳에서 저는 외모도 완벽하고, 운동, 악기, 댄스 등 못하는 게 없는 수퍼스타였습니다. 축지법을 하여 원하는 장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갔다 하며 해결사 역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백일몽이 하도 달콤해서 고등학교 올라가 공부 양이 많아질 때에는 애써 결심하며 공상 시간을 줄여나가야 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는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공상을 위해서는 완벽한 모델을 떠올리고, 내가 좋아하고 흠모하던 사람들을 카피하기 마련인데, 그래도 끝까지 유지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고유한 나의 자아였습니다. 상상 속에라도 결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원치 않은 것이죠. 아무리 완벽한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주고 좋아해주는 그 대상은 바로 ''라야 했습니다. 상상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까먹고 맨 끝에 남은 것은 축지법에 대한 진한 아쉬움과 고래심줄처럼 질긴 자아에 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도 참 어렵고, 간절히 다른 모습이길 원해도, 한 평생 부여잡고 이끌어가야 할 나 자신... 한 생을 살아내야할 주체도, 달든 쓰든 삶의 열매와 대가가 돌아갈 대상도 나 자신입니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살아내고 누려야 할 나, 밉다고 버릴 수 없고 힘들다고 빠져나올 수 없는 나... 그래서 상상이든 현실적인 노력이든, 우리의 깊고 깊은 바램은 자기에 대한 긍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타가 인정할 만한 진정한 자아 실현, 완벽한 자기 긍정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토록 소중한 자아, 나 자신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어떨까요? 기꺼이 자기를 포기하고도 남을 그런 진리, 그런 목적, 그런 가치가 과연 있을까요

공자는 진리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조문도 석사가이 (朝聞道 夕死可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 (논어)

모든 것을 뒤로 할 만큼, 심지어 일생을, 생명을 바쳐도 좋다 싶을 만큼 위대한 도, 진리를 깨우친 사람들의 고백은 어떠할까요?

우리나라에서도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임어당(林語堂, 린위탕, 1895~1976)은 유교, 도교, 불교 등 여러 종교들을 섭렵하였으며, 자신의 종교 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습니다.

"유교 인본주의의 대저택에 한동안 기거했고, 도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그 장관을 보았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 이후에야 최고봉에 해당하는 기독교 신앙에 올라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

그는 말년에 성경이 말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촛불을 꺼라. 동녁에 태양이 떠올랐다

(참조: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4/04/03/0901000000AKR20140403162100005.HTML)

 

진리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위태롭고 미덥지 못한 우리 밖에, 거기에, 엄연히 있습니다.

또한 진리는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처음엔 설레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한 빛에 내 어두움과 오류가 드러남을 알 때, 우리는 위협을 느끼고 불안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를 압도할 것입니다. 나의 민낯을 훤히 드러내는 그 진리의 빛이 놀랍게도 따스한 온기를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고 나를 맡기게 됩니다.

그렇게 진리가 동녁의 태양처럼 내 앞에 떠오를 때, 우리는 자유케 됩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위선에서 자유케 되고, 어둡고 캄캄한 허무의 심연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질기고 질진 나 자신에게서도 해방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외양간에서 놓여난 송아지가 기뻐 뛰놀 듯 껑충껑충 뛰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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